『아빙돈 단권주석』사건

 1  『아빙돈 단권주석』사건-1
 2  『아빙돈 단권주석』사건-2
 3  『아빙돈 단권주석』사건-3
 4  『아빙돈 단권주석』사건-4
 5  『아빙돈 단권주석』사건-5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아빙돈 단권주석』사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아빙돈 단권주석』사건
1. 서 론
김재준은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를 (1) 1885-1935년 : 선교사라는 보모 밑에서 얌전하게 보호 육성된 유, 소년기, (2) 1936-1945년 : 갑자기 부모를 잃은 고아와 같은 상태에서 온전히 이질적인 일본 사상과 일본 제국주의자에게 시련과 수난을 겪은 시기, (3) 1945-1960년 : 자유의 선풍 아래서 분열과 혼란에 휩싸여 돌아간 혼란기, (4) 1961년 이후 : 자기 비판, 재정돈, 재연합과 혁신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 시기라고 구분하고 있다. 김재준, ‘혁신과 통합의 출발점’, 전집 II, 148; 주재용 엮음, 『김재준의 생애와 사상』, 풍만출판사, 1986, 187에서 재인용
이 구분에 따르면, 1934-5년 경 한국장로교 내에 있었던 모세오경 저자 문제, 여권문제, 아빙돈 단권주석 문제 등은 보모인 선교사의 그늘에서 얌전하게 보호 육성되며 유,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한국교회의 신학의식이 선교사들의 품을 떠나, 유,소년기를 넘어 주체적 성숙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련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세 사건 중 특별히 『아빙돈 단권주석』의 번역 및 출판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과 제반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당시 감리교는 이미 1910년대부터 신학교에서 고등비평, 문서비평 등 진보적인 학설을 수용하고 있었고 신학의 변천에 대하여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별 문제될리 없었다. 따라서 문제가 컸던 장로교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2. 1930년대 신학적 상황
1930년대는 한국교회가 희년을 맞이하는 때였고, 한국적 신학의 기초를 다지는 시기였다. 반세기 동안 한국교회를 주도하였던 선교사들의 외래적이며 식민적이고 독단적인 보수 정통신학으로부터 벗어나 주체적이고 민족적이며 진보적인 한국신학을 모색하던 중요한 전환기였다. 주재용, 『한국 그리스도교 신학사』, 대한기독교서회, 1998, 164
또한 이 시기는 한국교회 신학사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때라 할 수 있는데, 일본이나 미국유학을 통해 선교사들의 일방적 신학교육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몇몇 신학자 1930년대에 활동한 신학자들은 남궁혁, 백낙준, 박형룡, 이성휘, 송창근, 채필근, 김재준, 김인영, 한치진, 박윤선, 유형기, 정경옥, 변홍규, 김영희, 갈홍기, 윤인구, 정일형, 이환신, 김창준 등을 들 수 있다.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다산글방, 2003, 199
들이 대거 귀국하면서 장로교는 단일 교단신학의 보수 유지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던 때였다. 유동식도 1930년대를 한국신학의 정초기라고 말하고 있다.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다산글방, 2003, 34
그것은 이 시기에 외국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많은 신학도들이 신학저서와 논문들을 내 놓았고 어느 때보다도 신학운동이 활발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는 그동안 선교사가 가져온 신학의 그늘을 벗어나 자신들의 신앙 노선에 대해 비판적인 눈을 갖고 신학적 논쟁을 벌일 수 있을 만큼 한국교회가 성숙해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당시 한국의 2대 신학지인 『신학세계』와 『신학지남』도 한국인 신학자들의 노작으로 그 내용이 많이 풍부해졌다.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 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320
이때 감리교는 신학적 사조의 변천과 신학연구에 비교적 자유로웠고 교권적 정죄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로교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장로교는 미국의 근본주의적 성향을 가진 선교사들에 의하여 그 신앙과 신학사조가 통제되면서 자유주의적 성서해석이나 신학활동은 허락하지 않았다. 송길섭, 『한국신학사상사』, 320
그리고 보수신학과 결탁한 장로교회의 교권은 선교사들의 후광을 받으며 자체 내의 자유주의적 사상의 소유자들에게 가혹한 철퇴를 가하며 이들을 저지해 갔다. 이러한 장로교 선교사들의 수구적 경향은 1930년대에 오면서 한국인 신학자 박형룡에게 이어졌고, 그는 교권과 결탁하여 자유주의적 신학활동에 날선 칼날을 휘둘렀다. 결국 이 시기 장로교의 신학은 선교사들의 신학과 선교사들의 신학을 이어받은 박형룡의 신학이 기준이 되었으며, 교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