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에 대하여
처음 장신대에 입학했을 즘에는 나름의 사역에 대한 인상 - 종 혹은 성직에 대한 - 들과 그에 따른 계획들을 상상하며 나날의 과정들을 따라 올라 왔는데.. 최근들어 후배들과 나누게 되는 대부분의 화두는 오히려 그리스도인 됨에 대한 제인식이다. 이는 교수님께서 마지막 강의 때 조금은 대담한 어조로 - 사실 교수님으로 부터 전통신학과 일별하는 다른 길로 가는 듯한 (특히 구원론과 관련하여 그러했다) 그런 말씀을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들려주신 말씀, "21세기의 기독교인됨은 철저하게 실천과 관련되어 있다." 라는 명제에 깊이 연루되어져 있는 듯하며, 이 과제에 임하고 있는 지금도 그 한마디의 말씀을 늘 곱씹으며 어찌 4학년 2학기의 한 단락을 점하는 여기, 현재 나의 자리에 녹여 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의 연장선상에 서있음을 느낀다. 아마 나의 신론에 대한 이야기도 여기서 부터 풀어가야만 정당할 것이다.
장신대를 입학한 후의 내내 신론의 문제는 늘 신정론적 질문에 직면해서 발발했던 것 같다. 기실 그러한 문제가 없었다면.. 나는 그저 교부시대에 언어를 세우고 중세시대와 정통주의 혹은 근본주의 신학이 매마른 어조로 모범답안처럼 세워둔 그 교설들을 그저 반복하여 숙지했을 따름이었을 것이다. 골치 아픈 신학적 문제들을 대할 때면 예수만 잘 믿으면 되지, 교리니 도그마니 그런 게 뭐 그리 중요하냐라고 일갈을 내뱉었던 적도 있으나 - 그때는 그러한 방식의 반응이 나름의 고민을 해결하는 길이라 여겼지만 얼마 못가서 그 허위성 또한 금방 들통 나고 말았다 -, 잠시만 역사를 되짚어 보아도 우리의 잘못된 신론이 얼마나 많은 순간 비인간적이고 반역사적이고 폭력적인 형태의 역사의 질곡 - 이는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나 정의나 기타 어떤 그의 성품과는 결코 양립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어떤 것인데 - 에 대한 주범이란 선고를 피할 수 없는 결과를 빚었던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비겁한 인식은 차리리 상황에 깊이 침투하여 자신을 산화하는 방식을 취하는, 때로 ‘비기독교적’이라고 오인 받는 일부 급진적 신학의 먼발치도 못따를 것이란 자학을 벗을 길이 없게 되고 말았다.
이만큼 심각한 또 다른 인상은 대부분 내가 세워 왔던 신론들은 몰역사적이었다는 매몰찬 비판을 받기에 마땅한 그런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우리가 감히 가늠하지 못 할 그 끝 날에 까지 언제나 하나님으로 계실 것이며, 역사의 한순간도 빼놓지 않으시고 늘 하나님이셨을 텐데.. 오늘날 내가 세워가는 신론들은 대부분 나의 관심과 나의 시대에 맞는, 그러나 조금만 역사적인 감각으로 기울여 보아도 치명적인 한계점들을 발견케 되는 그런 모자라는 어떤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요즘에 와서야 그것이 바로 신학하는 겸손이며 성실을 위한 비폭력을 위한 타당한 자리가 아닐까, 라는 감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성서무오론이나 하나님이 꼭 전지 전능하고 완전한 어떤 분이 되어야만 한다는 경직된 신론들을 등에 업고서,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위에 대한 그 어떤 정당한 도전들도 받아들이지 않고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대적자를 물리쳤던 그들을 거부하는 사람, 하지만 그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성정으로서 똑 같은 우를 범할 가능성을 짊어진 사람, 하지만 결코 그 자리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 되지 않고자 하는 사람, 차리리 겸손하게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소망하는 자리에 서고자 하는 ‘신학도’라면 이러한 한계(결코 완전, 혹은 절대에 이를 수 없는 학문을 안고 살아야 하는)는 오히려 좋은 벗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적으로 너무나 많은 왜곡과 생략과 오해와 편견이 신학과 신앙과 교회의 총체에 가득하니 그런 것들에 대해 예 아니오를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의 신론을 비롯한 대부분의 ‘신앙적 언어’에 매우 날카롭고 선명하고 사랑 넘치는 ‘신학적 노고’의 훈련이 더해져야 할 것이란 믿음에는 변함없이 아멘이다.
아무래도 서두가 너무 길었던 것 같다. 또한 나의 형편만큼이나 복잡하고 장황하고 산만한 듯 하다. 어쩌면 이런 서두에 비해 몸말이 되어야 하는 신론은 너무나 초라하고 짧을지 도 모른다. 하지만 이도 마땅한 어떤 것일 게다. 이제사 학부4학년을 마감하는 이의 신론이 너무나 거창하거나 커 보인다면 이는 분명 대부분 표리기 일정치 않거나 허위로 판명날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한 것들이 될 것이기에,
그러므로 이글의 끝을 바라보며 또한 새로운 시작을 즈음하여 결론적으로 필자 자신의 신론을 간력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먼저 ‘신인식론’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말할 수 없이 깊은 ‘질적 차이’를 인식하는 점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다만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 특별히 예수그리스도로 나타난 바르트적 교설의 자리에 하나님의 부스러기라도 발견하고 소망할 자리가 발생하지 않을까 그렇게 여겨본다. 아직 이러한 가르침 이상 나의 마음을 깊이 감도는 어떤 ‘신인식론’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름다운 언어의 지식인 당신 자신을 ‘나에게’ 들려 주시기 위해 ‘나만큼’의 눈높이로 낮추어 ‘나의 한계적 언어’를 사용하여 ‘나의 존재’ 한가운데 비쳐 오셨던 놀라운 그의 역사와 사랑의 행동(때로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기를 거부하여 다만 신비 혹은 기적이란 여백으로 남겨지는)으로 설명해주신 은총을 믿으며, 또한 그 ‘설명’에 담긴 당신의 신비한 능력으로 말미암아 필요충분히 당신 자신을 담아내었을 것이라 아직은 조심스럽게 끄덕여 본다. 그러므로 현대의 신학자들이 신화적 언어로 치부하는 바로 그 언어가 가장 적절히 하나님을 표현하고 또한 가장 분명히 하나님께 이어질 길을 내고 가장 가까이 하나님 곁에 그의 소리를 듣고 있는 언어일 것이라고 정리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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