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닉스 세미나] 제중원과 초기 선교에큐메니즘의 태동
열교(裂敎)들이 통(通)하다
‘원컨대 우리 교회에서 감리교, 장로교라는 이름이 어서 바삐 없어지고 둘이 합하여 하나만 되기를 원하고 원합시다. (S. F. 무어, ’平壤來信‘ , 1906년 6월 14일자)
19세기 선교 상황에서 피선교지에서의 요청에 의해 형성된 자발적인 연합운동으로서의 ‘에큐메니즘’과 1910년 에딘버러 세계 선교대회 이후로 형성 발전하게 된 ‘현대 에큐메니즘’은 그 간극의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다시 말해 19세기 내한선교사들은 당시의 세계적 흐름이었던 개신교를 대표하는 복음주의 선교사(evangelical missionary)로서, 그 활동의 1차적인 목표가 개신교의 선교활동에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실질적인 교회 분열 상황을 구체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선교 활동과는 분리된 개념의- 에큐메니컬 운동과는 달리, 19세기의 피선교지에서의 ‘선교 에큐메니즘’은 선교활동의 원활성과, 피선교지에서의 교파 간 불필요한 경쟁을 해소하려는 2차적 목적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겠다. 이른바 피선교지에서 선교의 수행을 위해 요청되는 모든 종류의 연대 활동과 연합 정신을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에큐메니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885년 이후 한국 선교현장에서 태동한 에큐메니즘과 그 전개과정을 탐색하기 위해, 내한선교사들이 첫 만남을 갖고 충돌과 제휴를 거듭했던 ‘제중원’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조명해 보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 제중원 선교 공동체의 형성
1) 선교지에서의 불가피한 동거
알렌이 내한 직후 설립한 ‘제중원(濟衆院, The Royal Corean Hospital)’은 그 형식이 ‘관민합작’이라는, ‘반(反, 혹은 半) 선교적’ 체제를 띠었다고는 해도 애초부터 이 기관이 초기 선교사의 활동 무대로 삼고자 했던 ‘선교적 목표’가 뚜렷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L. H. Underwood,, Fifteen Years in the Korea Mission, 1~2.
이러한 전후 경과를 딛고, 첫 복음 선교사의 한 사람으로 내한한 언더우드는 제중원에 속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정민, 서정민, “언더우드와 제중원 공동체”,『제2회 언더우드기념강좌』(연세대학교, 2002.10.), , 22.
헤론이 입국하기 이전까지 약 2개월 여 언더우드는 제중원의 약제사와 의료보조자로, 그리고 제중원 의학교육 코스에서는 물리, 화학, 기초 생리학 등을 가르치는 교수로 활동하였다. 이는 제중원의 초창기를 체계화하는데 공헌한 일이었던 동시에 언더우드 자신에게 있어서도 한국 개척선교사로 이제 막 내한한 입장에서, 제중원을 선교활동의 교두보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정민, 같은 논문, 23~24.
“이런 의미에서 선교사 한국 진출의 교두보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제중원(濟衆院)이었다. 처음 오는 선교사는 누구든지 교파와 관계없이 알렌을 통해서 그와 함께 일하는 방법이 아니고는 들어올 수 없었던 것이다.” 민경배, 『일렌의 宣敎와 近代韓美外交』, (延世大學校 出版部, 1991),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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