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튀링겐주 에르푸르트에서 상인 출신의 국회의원 8남매 중 장남으로 막스 베버 1세와 헬레네 팔렌슈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1870년부터 시작된 학교 시절에서는 다독가였으나 성적은 별로였고, 선생님들에게 버릇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베버 자신도 수업시간에 괴테 전집 40권을 몰래 읽을 정도로 학교 공부를 지루해했지만 관심 분야에 탁월한 능력(라틴어, 그리스어, 헤브루어 등)을 발휘했다. 특히 저명인사들과 아버지의 담론시간은 베버에게도 정신적 자극이 되어 관심영역이 확장되는 결과를 낳았다.
어릴 적 베버에게 큰 사건은 4살 먹은 여동생 죽음(1876)이었다. 아버지가 처음에는 딸의 죽음에 비통함을 가족과 공유했지만 곧 자신의 생활로 돌아가 외면해 버린다. 이 사건으로 인해 향락추구 정치가인 아버지와 사회 종교적 내면성에 집착하는 어머니의 대립이 표면적으로 들어난 것이다.
1882년부터는 하이델베르크대학 베를린대학 등 독일 각지의 4개 대학에서 법률학 철학 역사학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이 시절 2년 동안 아버지의 권고로 학생조합에서 활동하면서 술자리와 학생 결투 참여하게 됨으로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군복무를 하게 되면서 이모부 내외와 자주 왕래를 하게 된다. 이모부 내외를 두 번째 양친이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았다. 이모부인 헤르만 바움가르텐은 베버에게 정치적 지적 사부로, 1848년의 혁명정신 고수하면서도 David의 창조적 기업가적인 열정을 가진 인물이다. (보수주의적 아버지진보주의적 이모부)
1885-6년 괴팅건 대학에서 법학 국가고시 준비를 준비하면서 집중적 몰두성향과 일중독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1902년만 제외하고는 최소 1년에 한편씩 논문 발표한다. 졸업 후에는 재판소의 사법관시보로 근무하는 한편, 연구를 계속하였다.
1892년 베를린대학을 시작으로 프라이부르크대학 하이델베르크대학 등에서 강의와 연구에 종사하였다. 베를린대학의 교수 자격 논문인 〈로마 농업사〉(1891)와 프라이부르크대학 취임강연인 〈국민국가와 국민경제정책〉(1895) 등은 당시의 중요한 논문이다. 1893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 추천받음으로 학문적 방향전환의 첫 번째 계기가 되어 법학자에서 경제학자로 전환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아버지의 조카딸 마리안네 슈니트거와 결혼한다. 그녀는 베버에게 지적 도덕적 동지였던 것 같다.
1887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중요한 전환의 해인 것 같다. 공적으로는 상기 주식위원회의 최종 구성과정에서 탈락하고 국회의원 출마 제의를 거절했다. 이로써, 제도권 정치 영역 내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봉쇄되었다. 그리고 사적으로는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사망과 신경쇠약증에 걸린다. 아버지와 대립이 있은 후 갑자기 사망하게 되어 화해를 하지 못한 것이 신경쇠약증의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신경병의 온상인 자기정체성 형성에 많은 어려움을 주었다.
하이델베르크대학 재직 중에, 심한 신경쇠약에 걸려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쉽게 수리되지 않았다. 유럽 각지에서의 투병생활 끝에 1902년경부터 다시 연구생활에 들어갔다. 병후에는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잡지》의 편집을 맡아보고, 〈사회과학적 및 사회 정책적 인식의 객관성〉(1904)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1904~1905) 등의 논문을 집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하고 퇴역 후 정치활동에 투신하였다. 군생활로 인해 관료제의 내부시각에 대한 값진 경험을 쌓게 된다. 패전 후에는 독일 민주당에 들어가 계몽활동을 하는 한편, 뮌헨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다가 1920년 6월 폐렴으로 사망했다.
시대적 배경 - 독일의 통일과 정치
19세기 프로이센(프러시아)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 의해 군비를 늘리고 있었다. 부국강병 정책으로 프로이센 국민들의 생활은 윤택해져갔고 군대는 엄청나게 강해졌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전국토를 통일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 승리하게 된다. 이로써 국운상승의 기틀을 잡았고 1871년 남독일을 모두 통일하여 대독일 제국 제 2제국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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