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스피에르와 공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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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베스피에르와 공포정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로베스피에르와 공포정치
1. 들어가기
프랑스 혁명의 상징적 인물하면 흔히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떠올린다. 테르미도르 반동이후 등장하여, 유럽전역에 혁명정신을 퍼뜨린 것은 사실이지만, 프랑스 혁명을 대표하는 인물은 실제적으로 로베스피에르라고 할 수 있다.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e)는 프랑스 혁명당시 공포정치를 시행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과연 로베스피에르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왜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는가?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공포정치가 오늘날에 남기는 의의는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2. 본문
1) 기요틴으로 상징화된 로베스피에르는 어떤 사람인가?
프랑스 대혁명의 기간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1789년 7월 14일 부터 보나파르트가 등장한 1799년 11월 10일까지로 보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혁명을 주도했던 것은 자코뱅이었다. 자코뱅이 우파인 지롱드를 숙청하고 공안위원회를 운영했던 시기가 바로 공포정치를 했던 시기이다. 이 자코뱅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바로 로베스피에르이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좌파와 우파가 역사상 처음 등장했던 프랑스 대혁명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대혁명은 새로운 사회계층인 부르주아지가 성장하여 기존 귀족 기득권층에게 반발하며 일어난 사건이다. 귀족 기득권층은 당시 왕당파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이들에게 대항 했던 것이 ‘혁명 세력’이다. 혁명 세력은 1신분과 2신분이 프랑스 사회를 주도하던 구체제 모순(Ancien regime)에 반발한 제 3신분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들은 의회를 세우고 권력을 잡아나가자 새로운 사회를 어떻게 구성할지 논의했다. 한 세력은 현재의 틀을 유지하면서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들이 지롱드이고 당시 자크 브리소가 주도했다. 다른 세력은 민중과의 연대를 통해 진정한 ‘구체제 모순’을 극복하자고 주장했다. 이들이 자코뱅이었고, 로베스피에르가 이끌고 있었다.
당시 지롱드은 ‘자유’라는 모토에 더 집작했고, 자코뱅은 ‘평등’이라는 모토에 더 집착했다. 자코뱅은 공포정치를 시행하면서 지롱드를 탄압하는 공포정치를 시행했다. 하지만 이내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다시 보수세력(우파)이 권력을 잡게 되고 프랑스 공화국의 기본 체제가 수립된다. 프랑스혁명의 의의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보수 사회의 수립과 좌파 담론의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코뱅은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진정한 ‘평등’을 요구했고, 지롱드을 기득권층과 타협한 부르주아지라고 비판했다. 그는 결코 ‘부패할 수 없는(incouptible)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곧게 살았고, 이러한 그의 정신이 기요틴으로 상징화된 공포정치를 낳게 되었다.
2) 로베스피에르는 왜 공포정치를 시행했는가?
공포정치는 기요틴(단두대)에서 15,0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엄격한 법령으로 다스리던 사회였고, 심지어 자코뱅 당원도 처형당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던 공포적 독재시기이었던 것이다. 특히 로베스피에르의 유명한 말인 ‘덕이 없는 공포는 재난을 부르고, 공포 없는 덕은 무력하다.’는 그의 공포정치 사상을 매우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정치에 관해서 오해를 풀어야 한다. 15,000명이라는 숫자는 전체주의국가의 탄압이나 봉건적 국가의 탄압에 비하면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다. 게다가 죽은 사람들은 대부분 기존 기득권층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방토즈 법령이나 프레리알 법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자코뱅의 3가지 분파가 존재했는데, 우파와 타협을 했던 당통이 이끌던 관용파와 민중의 복수심을 이용한 에베르가 이끌던 격양파가 존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관용파와 격양파가 올바른 자코뱅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탄압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