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타자와 함께 구조를 넘어 기쁜 마주침을 위해
기쁜 마주침을 위해
개체(the individual)와 관계(relation) 그리고 배치(agencement)
개체와 관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 세계는 개체들(the individuals)로 가득 차 있다. 각각의 개별자들이 모여 로서 세계를 가득 메운다. 하지만 철학적 사유가 이처럼 간단하고 명료할까? 아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간편하고 속이 시원하겠는가. ‘개체가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실체’라는 명제는 어쩌면 상식적인 주장으로 들리지만 사실 철학사는 다양한 방향으로 개체를 넘어선 ‘그 무엇’에 관해 말해 왔다. 개체를 넘어서 ‘그 이하’의 영역을 탐구했던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을 상기하면 세상을 구성하는 실체를 원소와 원자, 혹은 근본적인 물질단위에서 고민했음을 떠 올릴 있다. 탈레스(Thales, BC 624?~BC 546?)의 물과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BC 585?~BC 525)의 공기를 생각해 보아라. 또한 이는 현대과학이 실체를 바라보는 입장과 상당히 유사함을 드러낸다. 이에 반해 개체를 넘어선 ‘그 이상’을 바라보며 가짜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를 넘어서는 이데아(Idea)를 추구했던 사유의 흐름이 있다. 요컨대 진정한 실체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느끼는 경험세계가 아니라 초월적인 영역 즉, 하늘에 있다는 주장이다. 하늘에 이데아가 있고 우리는 타락하여 물질과 결합한 그림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상당히 신화적인 발상인데 이는 물론 플라톤(Platon, BC 429?~BC 347)의 생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까지의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철학이 초월적 존재탐구로 경도되는데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실질적으로 개별자가 실체이고 본질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가 “개체야 말로 진정한 실체다”라고 말했을 때 개체 이하와 그 이상만을 말했던 당시의 철학적 흐름에 커다란 반향을 가져왔다. 결국 이후 아리스토텔레스도 개별자를 쪼개서 나온 형상(eidos)을 본질로 간주하지만 개별자에 대한 논쟁의 씨앗을 불러온 것은 확실하다. 이처럼 세계가 개별자로 이루어졌다는 명제가 간단한 언어적 배열만은 아니다. 이미 조직화된 개체가 경험적, 직관적으로 살아가는 세계와, 인식을 통해 발견하는 깊은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사유는 현대에 와서도 흥미로운 철학적 소재이다.
개체와 관계의 변증법
두 개의 개별자가 있다고 생각하자. 관계는 상식적으로 두 개별자들 사이에서 성립한다. 이 경우 개별자들이 사라지면 관계도 사라질 것이다. 허나 관계가 먼저 존재하고 개별자가 그 항을 채운다고 주장하면 어떨까? 우리는 이미 모든 관계가 조밀하게 직조된 방계형 공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일반성으로 사물을 통합한 10개의 범주에 ‘관계’를 포함시켰으며 실체에 부수하는 성격을 띤다.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가 없이는 관계도 없다. 반대로 플라톤은 관계범주에 독자적인 이데아를 할당함으로서 관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현대적인 사유에 근접하게 된다. 칸트(Kant, 1724~1804)에서도 일차적인 것은 양, 질, 관계, 양상이고 관계를 실체보다 중요하게 보았다. 구조주의에 이르러 개별자의 독자적인 의식보다는 타자들과 맺는 관계와 전체구조 상의 위치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이럴 경우 개별자의 의미는 무수한 타자들과의 차이(different)들의 놀이에서 나온다. 이 명제는 토테미즘(totemism)의 심볼(symbol)이 부족과 필연적 인과관계를 맺는다기보다 타 부족과의 변별력에서 형성된다는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1908 ~)의 분석을 바탕으로 프랑스 구조주의(structuralism)의 근간을 형성했다. 레비-스트로스의 말대로 “의미는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는 요소들의 조화로부터 발생한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개별자의 의미는 타자들과의 관계로부터 파생하며 관계중심의 사유가 보다 구체화된다. 우리가 2006년도 1학기 대학에서 철학관련 교양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구조주의적으로 해석해보자. 이미 존재하는 커리큘럼(cuiculum)의 교과목이 있고 강의가 성립되기 위해선 강사와 학생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강의를 구성하는 강사와 학생의 관계가 먼저 존재하고 그 위치에 우리가 각각 배치되었다고 생각하면 관계중심의 구조주의적인 사고를 전개한 것이다.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지만 이처럼 관계를 실체에 우선해 사고하게 되면 주체 중심적이었던 서구 인식론에 적지 않은 균열을 가하게된다. 요컨대 우리가 하고자 하는 상당수가 이미 존재하는 관계들에 편입하고 싶어 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공부하고 지식을 쌓아 가는가? 바로 전체 사회구조에서 좋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함 아니겠는가?
좋은 배치와 좋은 마주침
모든 것을 하나의 논리로 환원가능하다는 본질주의와 근본주의가 ‘너’ 와 ‘나’의 차이를 말해 줄 수 있을까? 어쩌면 구조주의도 인간 이성중심의 서구관념론 철학을 반성하면서 도출된 사유라 할 있다. 이성(개별자)중심으로 대상(타자)을 기계적으로 환원하려는 사유에 대한 반론의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구조가 모든 의미를 생성하는 ‘근본’으로 간주된다면 개체를 둘러싼 구조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논리로 연결된다. 이는 개체중심의 사유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유의미성을 띠지만 다시 또 다른 환원주의로 이동함으로써 한계를 노정하는 것이다. 사실 구조주의가 갖는 함의는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이러한 구조주의적 입장을 통해 자신 스스로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의 관계설정을 뚜렷이 이해하고 사유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구조주의의 기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긍정적인 작용이라 인정한다면 구조주의는 극복되어야 한다. 개별자가 스스로를 지각한다면 이것은 이미 구조주의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구조주의로는 이러한 개별자들의 ‘인식’ 차이를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들뢰즈(Deleuze, 1925~1995)는 기계(그는 모든 개별자를 기계로 표현한다)들의 배치를 말한다. 그러면서 고정된 구조를 굳어버린 부패한 조직으로 간주하며 기계들의 끊임없는 접속과 일탈 그리고 영토화와 재영토화를 말한다. 이는 구조주의를 극복하고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독특한 배치의 철학이다. “배치는 구조가 무너지는 탈주선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탈주선은 개별자 모두에게서 발견될 수 있으며 이로써 그는 구조 환원주의를 극복한다. 또한 동시에 상호접속을 통한 타자와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항상 배치에 속할 수밖에 없는 기계(개별자)들을 말하며 구조주의적 입장을 흡수한다. 우리는 좋은 배치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해야 하는 존재이며 대중(multitude)은 이러한 배치를 만들어 가는 능동적인 주체들인 것이다.
수업을 독해하기 위해 개체와 관계 그리고 배치를 개념틀로 설정해 보았다. 다소 이질적이고 어긋나는 면이 존재하지만 전반적인 수업의 내용을 포괄하고 싶은 욕심에 선 뜻 용기를 내 보았다. 수업시간을 통해 접해본 영화들에서 의미를 축출하고 이를 철학적 사유로 재구성해 텍스트를 전개할 것이다. 평소 접해보지 못했던 영화를 통해 현실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 가능함을 알게 되었기에 영화를 중심으로 사유를 펼쳐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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