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마음 인간의 마음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에 대하여 플라톤은 형이상학의 태제를 빌려 영혼의 지향점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현실의 요구에 따라 이데아의 추상성은 점차 불식되어 갔다. 개인과 전체의 불화가 깊어지던 시기의 인간은 오로지 내면으로부터 평온을 되찾고자 했다. 자력으로 행복에 접근하려하자 인간은 스스로의 불완전성에 직면했고, 동요 없는 절대자를 상정하여 그로부터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종교가 현실과의 괴리를 보일 때 즈음 인간은 절대자에 종속된 삶으로부터 끊임없이 이탈을 시도하였고, 현실 속에 존재하는 나로부터 세계가 비롯됨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제껏 개인의 신념이나 지향으로 대체되어온 인간 존재에 대한 규정은, 현재에는 보다 실증적인 방식으로 수립되고 있다. 진화론에 근거하여, 인간의 마음은 스펀지와 컴퓨터의 마음으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이론들은 두뇌의 학습 기능을 설명하기에 만족스러운 것들이었다. 여기서 더 발전한 것이 여러 가지 지능들이 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스위스 아미나이프(맥가이버 칼)와 같은 마음이다. 진화론적 심리학자들은 원시의 인류가 맞닥뜨린 생존의 기로에서 몇 가지 지능들이 분화된 경로를 확인하고 있다. 인간의 고차원적인 사고 활동은 이러한 지능들이 소통하게 된데 기인한다. 지능과 지능 간에 영향을 주고받게 된 계기에 대한 추정도 꾀나 설득력을 확보하고 있다. 예컨대 자연사 지능과 기술 지능이 유동성을 갖게 되었을 때 사냥의 성공률이 훨씬 높아진다는 것이다.
선택되어진 경로가 다를 뿐, 지구상의 생명체들은 모두 진화의 결과라는 견해를 나는 신뢰한다. 때문에 진화론의 입장을 취했을 때 당면하게 되는 제반의 문제들을 외면할 수도 없는 처지이다. 이제부터 이끌어갈 논의의 초점은 동물과 인간과의 차이를 규명해 내는 데에 있다. 점진적으로 형성되어온 인간의 마음이 한편으로 동물과는 어떠한 이질적인 행위를 낳았는지, 인간의 사회가 도덕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해 보고자 한다.
이미 종영된 지 오래인 ‘경찰24시’라는 프로그램에서 나는 흥미로운 사건일지를 재현영상으로 접했던 기억이 있다. 경찰이 한 남성을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하여 검거했는데, 이러타할 물증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범죄심리학자의 자문을 얻어 경찰은 살인이 일어났던 현장을 밀실로 만들어 그곳에 용의자를 홀로 있게 하였다. 이때 용의자가 갇힌 공간은 조명하나 없는 암실 상태였다. 사전에 경찰에 협조할 것에 순순히 응했던 용의자는 사건현장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겁에 질린 모습으로 크게 울부짖었다. 이 남성은 밀실에서 뛰쳐나와 자신의 혐의를 모두 시인했다.
인간이 지니는 죄책감은 동물과는 구별되는 대표적인 성향 중에 하나이다. 엄밀한 의미의 ‘마음’을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에게 위해를 입혔을 때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죄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스스로가 타인이 입장이 된다는 것, 이런 사고가 고차원적으로 발전한 것은 집단생활을 영위하게 된 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택해온 경로들을 되짚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여정에서 도덕의 발생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독립적인 삶보다 공동체적인 삶에서 얻는 이득이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점차적으로 무리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원시의 인류가 좇은 일련의 선택 과정들은 모두 생존의 기로에서 행해진 것들이며, 시행착오 끝의 귀결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에는 문자 이전의 역사를 회상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공동체가 발생한 연원을 그의 신념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공동체에의 지향은 본성이 그러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경험을 통한 각성이었고, 후대에는 고민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지로가 되었다.
오늘날 자유주의 이념은 인간의 진실된 존재가치를 증명한 최초의 사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존재, 공동체 안에서 자아를 실현하는 존재라는 종속된 정체성보다 자율성을 지닌 독립적 존재라는 자유 이념의 정체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옳다. 공동체가 설계된 목적 자체가 개체의 생존과 이익관심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앙이나 강제 없이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개인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삶을 악화시키는 공동체는 존립 근거를 잃는다. 때문에 민주주의는 가장 유력한 사회 운영 원리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개인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어째서 도덕의 정체성까지 그와 함께 개체적으로 구성되어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도덕은 인간이 자유 이념을 획득하기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미 형성되어진 도덕의 존재성을 부정하고 개인의 합의로서 그것을 재구성하려는 수고를 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어째서 도덕의 유구함을 고려하지 않고 그것을 증명하려 하는 것일까. 그들이 자유주의 이전의 도덕에 더욱 주목했더라면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덕은 개인이 합의하기 이전에도 개인들의 삶을 위해 봉사해 왔다.
도덕의 발생은 인간이 존엄성을 지닌다는 의식에 앞선다. (물론 도덕이 있기 이전에도 인간은 존엄성을 지닌다.) 도덕은 집단생활에서 발생하였다. 인류가 공동체를 선택하기 이전에 도덕이 고려되었을 리 만무하다. 타자에 대한 각별한 의식 없이 권리를 주장하거나 의무를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할뿐더러 계기가 충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개인 간의 상호의존성은 공동체 사회에서 구현되었다. 도덕이 보편성을 지녀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공동체 내의 개인이 도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도덕은 이미 개인들의 선택에 의해 형성되어온 산물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의 태제를 빌릴 필요도 없었다. 물론 형이상학을 좇는 편이 당위성을 증명하기에는 훨씬 수월하다. 하지만 형이상학에 의해 도덕이 지지되었던 것은 도덕의 시원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덕적 가치는 시공간적 맥락에 따라 취사선택되어왔다. 물론 항시적으로 선택되어온 가치도 있다. 그러한 가치는 초월적인 가치로 이해되고 있다. 초월적인 가치는 자칫 도덕이 외부에 실재한다는 오해를 빚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초월적인 가치들은 생존에 직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예컨대 개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들은 매순간 도덕의 이름으로 반대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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