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
피히테
1.1. 피히테의 생애
1.2. 피히테의 지식학
1.3. 자아와 지식학의 원칙
1.4. 피히테 철학의 비판과 의의
2. 셸링
2.1. 셸링의 생애
2.2. 피히테에서 셸링으로
2.3. 셸링의 자아
2.4. 동일 철학과 자연철학
3. 피히테와 셸링 철학의 의의
1.1. 피히테의 생애
요한 고트리이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는 1762년 5월 독일 오버라우지츠 지방의 람메나우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통상적으로 부유한 집안 내력을 가지고 있는 여타의 철학자들과는 다르게 피히테는 레이스 제조공 집안의 여덟 남매 중의 장남이라는 다소 빈약한 가정 출신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지역의 귀족 ‘밀티츠 남작’의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18세 되던 해인 1780년에는 그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던 예나(Jena) 대학에 진학하게 되고 스피노자의 「윤리학」을 접한 후, 본격적인 철학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결정론적인 철학은 피히테가 이후 칸트 철학을 연구하면서 그의 자율 정신에 크게 감명을 받고 스스로를 칸트 철학에 매진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그는 당돌하게도 칸트가 머물고 있는 쾨니히스베르크로 직접 찾아가 칸트에게 자신의 학업을 도와 달라는 부탁하고, 칸트로부터 직접적인 재정적 지원을 받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가 그로부터 1년 뒤 발표한 「모든 계시에 관한 비판의 시도」가 세간에 칸트의 저서로 잘못 알려지게 되면서 칸트 그리고 세간으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이후 스스로를 칸트의 후계자로 자청한 피히테는 칸트철학의 계승자이자 그의 철학을 보완해 완성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이를 위해서는 하나의 유일한 원칙으로서의 학을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등장하는 피히테의 지식학은 1794년 그가 예나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고 「지식학 즉 소위 제일철학의 개념에 관하여」 란 강의 안내 글과 「수강자를 위한 수고로서의 전체 지식학의 기초」라는 수고를 기반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의 이런 활동은 1798년, 자신의 옛 제자였던 포베르크(Forberg)와 함께 한 저널에 기고한 ‘종교 개념의 발전’이란 논문이 바이마르 정부와의 갈등을 빚게 만들면서 일명 ‘무신론 논쟁’에 휩싸이고 예나 대학에서 해임되게 된다. 이후 베를린으로 이주한 피히테는 정치적, 법률적인 문제들에 대한 왕성한 저술 활동 및 지식학에 대한 강연 활동을 펼친다. 하지만 오랫동안 철학적 친분을 유지해왔던 셸링이 뜻을 달리하면서 그와의 관계가 단절되고 셸링의 편을 들어준 헤겔 또한 피히테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이 후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쟁은 피히테를 도피 생활로 이끌고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피히테는 현 상황에서의 지식인의 의무에 대해 고민한다. 그 결과로 탄생한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란 강의는 1808년 책으로 출간되어 독일인들에게 교육과 도덕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이를 바탕으로 건립된 베를린 대학의 총장으로 취임된 피히테는 총장직을 그만두고도 지식학과 관련된 많은 강의들을 행한다. 1814년 군인 병원에서 간병 역할을 하던 중 장티푸스에 감염된 아내에게 전염되어 5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1.2. 피히테의 지식학
피히테의 지식학의 탄생 배경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모든 지식이 근거해야 할 하나의 유일한 원칙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제일원칙을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철학이 ‘앎의 일반에 관한 학문’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피히테에게 철학은 앎(Wissen)의 ‘대상’들에 관한 것이 아닌 앎의 행위와 그 가능성의 조건들에 관한, 다시 말해 ‘지식 일반’에 관한 학문이었던 것이다.(37쪽) 이런 앎의 조건들에 중점을 둔 피히테가 칸트의 철학에서 문제 삼았던 부분을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칸트의 철학, 그 중에서도 인식 과정에 대한 그의 설명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 주관인 ‘나’가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는 물자체는 시간과 공간으로 대표되는 감성을 통해 우리에게 현상으로서 나타난다. 이 현상은 다시 양, 질, 관계, 양상이란 범주로 구성된 지성을 통해 다시 한 번 분류되고 구성되어 대상이라는 것으로 완성되는데 이 구성된 대상의 집합이 최종적으로 나의 세계를 이룬다. 이는 일종의 인식의 한계이자 우리가 파악 가능한 범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를 내용과 형식 측면에서 보자면 이 세계를 구성한 내용물의 근거가 되는 것은 물자체이고, 이런 내용물을 인식 주관이 재구성한 것은 형식적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칸트의 철학이 구성주의 철학이라고 비판받는 것처럼 피히테 또한 이 점을 이미 꿰뚫어보았던 듯하다. 그는 칸트 철학의 문제점으로 ‘대상의 인식주관 의존성’을 언급했는데 이는 한마디로 말해,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세계는 결국 우리 인식체계, 즉 감성의 보편적 조건과 지성인식의 체계가 자의적으로 구성한 세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에 대해 칸트는 우리가 현상들의 연관 관계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김재호,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 피히테 「지식학의 기초」, 2005, 40쪽
하지만 이는 바꾸어 말하면, ‘물자체는 결국 파악될 수 없다’라는 말과 동일하다. 피히테는 이 점을 타파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칸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시도하게 된다. 칸트가 대상으로부터 인식 주관으로 ‘초점’을 옮겨온 인식 구조의 전회를 꾀했다면, 피히테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칸트가 구축한 인식 과정 내에서 물자체로부터 지성인식으로의 단순한 사유의 초점이 아닌 그 ‘정당성’ 자체를 전회 해버린다. 즉, 물체의 실재성의 근거를 물자체가 아닌 지성 인식인 주체에게로 아예 옮겨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의 철학이 칸트의 독단철학을 극복한 진정한 비판철학이며, 칸트의 철학을 완성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대상은 ‘사유하는 나에게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식 주체의 사유의 법칙에 따라 산출된 존재에 관한 사유’인 것이다. 이것을 피히테는 ‘관념론자와 독단론자간의 싸움은 사실 자아의 독립성에 사물의 독립성이 희생될 것이냐 아니면 반대로 사물의 독립성에 자아의 독립성이 희생될 것인가의 문제이다’(42쪽 재인용)로 표현하고 있다. 다만 이런 자기 산출, 자기 파악의 형태는 하나의 유일한 원칙에 근거하는 지식학의 형태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고 이런 하나의 통일적 구조의 설립을 위해 피히테는 그토록 지식학을 정초하고자 하고자 했던 것이다.
1.3. 자아와 지식학의 원칙
지식학의 최상의 원칙은 ‘자아’(Ich)이다. 이는 물체의 실재성을 근거 짓는 원인이 주체라는 점에서 자명하다.(사실 자아 개념은 칸트의 지성(또는 이성) 개념과 다를 것이 없지만 조금 더 그것의 활동과 위상에 정당성을 얻었다는 점에서 다르게 표현해줘야 함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이런 자아의 활동과 산출의 정당성을 전 인식 대상으로 확대해나가는 일일 것이다. 자아의 사유가 단순히 자아 자신에게만 머물러서는 학문이라고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일원칙을 찾으려는 시도와 이것으로부터 출발하려 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심에 자아라는 개념을 두었다는 점은 우리가 잘 아는 데카르트의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얼핏 보면, 자아의 활동이 실재성을 낳는다는 피히테의 철학과 일치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이런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 철학의 피히테 철학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자아의 활동에 따른 실재성의 범위에 있다. 즉, 데카르트는 여전히 우리 의식(사유)밖의 사물들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칸트처럼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데카르트의 철학이 회의적 관념론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피히테의 지식학은 회의적 관념론의 확장판이다. 이 대상의 실재성을 자아뿐만이 아니라 대상 전체에게 확장시키기 위해 피히테는 다음과 같은 지식학의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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