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계 박인로의 생애와 문학세계(노계 박인로 생애, 문인으로서 그의 삶, 박인로의 작품, 박인로의 문학세계)
[노계 박인로의 생애]
1561(명종 16)∼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덕옹(德翁), 호는 노계(蘆溪)·무하옹(無何翁)이며, 영양 도천리(永陽 道川里:지금의 경상북도 영천군 북안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시조는 신라의 박혁거세(朴赫居世)라고 하나 너무 세대가 멀어 제43세손이 되는 진록(晉祿)으로 중조(中祖)를 삼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시재(詩才)가 뛰어나 이미 13세에 〈대승음 戴勝吟〉이라는 한시 칠언절구를 지어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동래·울산·경주지방을 비롯하여 영양군도 잇따라 함락됨에따라 붓을 던지고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38세 때는 좌절도사(左節度使)인 성윤문(成允文)의 막하에 수군(水軍)으로 종군하여 여러 번 공을 세웠다. 1599년 무과에 등과하여 수문장(守門將)·선전관(宣傳官)을 제수 천거에 의하지 않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리던 일. ≒제배(除拜).
받고, 거제도 말단인 조라포(助羅浦)에 만호(萬戶)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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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자주 깨우는 뻐꾸기 울음 소리
어찌하여 시골 사람 마음만 재촉하느냐.
저 화려한 서울 부자집 처마에서나 울어
농사 재촉하는 새 있다는 걸 알게 하려므나.
→ 그의 재능을 과시하는 예로 자주 들고 있는 이 시는, 시골 사람으로서의 서울 부자에 대 한 대타의식까지 보여주고 있는데, 그 의식상으로도 대단히 조숙한 면을 보여 주고 있 다.
[문인으로서 그의 삶]
그는 무인의 몸으로서도 언제나 낭중(囊中)에는 붓과 먹이 있었고,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시정(詩情)을 잃지 않았다. 그의 후반생은 독서수행의 선비이며 가객으로서의 삶으로 보내게 된다. 즉 문인으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한 것은 은거생활에 든 40세 이후로 성현의 경전 주석연구에 몰두하였고, 밤중에도 분향축천(焚香祝天)하여 성현의 기상(氣像)을 묵상하기 일쑤여서 꿈속에서 성·경·충·효(誠敬忠孝)의 네 글자를 얻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자성(自省)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여러 도학자들과 교유 서로 사귀어 놀거나 왕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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