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씨의 유래
우리나라 최씨(崔氏)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굵은 경주최씨는 사로의 6촌중 돌산고허촌장(突山高墟村長:사량부)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로 받들고, 그의 24세손으로 전하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여 누대로 살아온 경주를 관향으로 삼아 명문거족의 문호를 열었다. 857년 신라의 사량부에서 출생했던 고운은 어려서부터 총명,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10년안에학문의 대가(大家)를 이루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세 때 혼자 당나라에 건너가 선주율수현위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치적을 쌓아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에 오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승사(承賜)받았다.
특히 고운은 관계에 나가서도 학문에 힘을 기울여 [중산복궤집]과 [육조사적(六朝事蹟)]에 오른 [쌍녀분기담(雙女墳奇談)], [계원필경(桂苑筆耕)] 등의 명저를 저술했으며, 884년 28세가 되던 해 10월 당나라 희종의 조서(詔書)를 받들고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가 되었다.
894년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상소하여 국정의 어지러움과 민생의 도탄을 구하려 했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퇴관하여 산천을 소요하며 소풍농월과 휘호농필(揮毫弄筆)로 울적한 마음을 달래다가 만년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961년(고려 광종2)에 95세로 선화(仙化)했다고 한다.
특히 고운(孤雲)은 당시 동이(東夷)라고 멸시해 오던 동방인(신라인)으로서 당나라 명사들과 학문으로 겨루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일찍이 신라의 국정을 개탄했던 고운은 [계림은 누른 잎과 같고, 송도는 푸른 소나무와 같다.]고 말하여, 고려가 신흥국가로 융성하리라는 예시를 왕건에게 보냈으며, 그의 자손들과 문하생들이 고려 건국 초에 출사하여 벼슬을 지냈으므로 후일 현종은 [최치원이 고려 창업에 은밀한 공이 있다]하며 내사령(內史令)에 증직하고 문창후(文昌侯)로 증시(贈諡)하였으며, 조선 때 와서는 인조, 명종, 선조 임금이 [문창후 최치원은 우리 동방의 이학시조(理學始祖)이니 그의 자손은 귀천이나 적서를 막론하고 비록 먼 시골에 사는 사람까지라도 군역(軍役)에 동원하지 말라]고 전교(傳敎)하였다.
한편 재능이 특출하여 태조 왕건으로부터 지극한 총애를 받았던 승로(承老:고운의 손자)는 나이 겨우 12살에 태조 앞에 나가 [논어(論語)]를 암송하였는데 60고개를 막 넘어선 태조는 이를 기특하게 여기어 승로에게 염분(鹽分)을 하사했으며, 학자들이 드나드는 원봉성의 학사로 보내어 학문하는 분위기 속에 젖어들게 하였다.
그 후 승로의 나이 17세 때 고려 태조가 죽고 태조의 뒤를 이은 혜종을 비롯하여 정종, 광종, 경종을 거쳐 6대 성종에 이르기까지 다섯 임금을 모시면서 고려 창업 이후의 여러 가지 모순과 신라로부터 이어져온 적폐, 또는 문물제도의 미비에서 오는 여러 가지 혼란들에 대하여 세밀히 분석하여 군제의 개편, 과다한 불교행사의 중지, 무역의 절제, 지방관제의 확정, 관복의 제정, 승려의 횡포 엄금, 공역(貢役)의 균등, 우상의 철폐, 신분제도의 확립, 개국공신 후손의 등용 등 국가의 전반적인 정책을 간추린 [시무28조]를 상소하여 이를 시행케 함으로써 고려왕조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이렇게 신라 말과 고려 초기에 명망을 떨쳤던 경주최씨는 문창후 최치원의 후대에서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와 판서공파(判書公派)를 비롯하여 광정공파(匡靖公派)와 계림군파, 충렬공파(忠烈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문밀공파(文密公派), 문정공파(文正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등 크게 26파로 분파되어 세계를 이어오면서 명문거족의 지위를 굳혀왔다.
각 계통별로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 관가정(觀稼亭) 청(淸)이 평소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직언을 서슴지 않아 많은 고난이 따르기도 했으나 나라를 위하는 충절 앞에는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당시 권신 신돈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어 벼슬이 좌천되기도 했으나, 1374년 첨의중찬을 제수받아 내직으로 다시 들어갔고, 우왕 때 사복시정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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