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감성 계발 사랑의 변주곡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는 길은 아는 것과 걷는 것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아는 것과 걷는 것, 이념과 실존, 그 사이에는 경험으로 밖에 매꿀 수 없는 거대한 틈새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괴리감과 분절감이 인간을 절망시키고 좌절시킨다.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어낸 유토피아와 감성의 제국이 하나 둘씩 붕괴되어 가는 모습 앞에서 인간의 모든 사고와 가치관은 갈기갈기 찢어진다. 감당 할 수 없는 거대한 고통이 엄습 할 때 인간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되는가? 대부분의 인간은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회피함으로써 안정을 획득한다. 그리고 다시 머릿속에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가 한 번 더 회전한다.
김수영의 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히려 고통과 마주보고 고통과 싸워서 이기는 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시는 그 자체로 고통스럽다. 마치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건넨 빨간약처럼 불편한 진실들이 시구 하나하나에 묻어있다. 이 시는 독자에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라고 한다. 판도라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 아무리 추악한 것들이라도, 그것 역시 세계의 단면이자 진실이기에 제대로 눈에 새겨야한다고 한다. 그래야 뫼비우스의 띠를 끊을 수 있다고, 이념과 실존의 틈새를 좁힐 수 있다고 절실하게 말한다.
이러한 진실의 폭로는 시의 첫 부분부터 독자를 찌른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욕망이 수반되지 않는 사랑이 존재 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사랑은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이자 숨겨진 실체가 아닐까. 사랑이 언제나 숭고하고 센티메탈 해야 한다는 것은 나의 감성이 만들어낸 목가적 낙원의 일부가 아닐까. 그렇게 김수영은 나의 뿌리를 흔든다. 김수영의 시 안에서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수없이 전복되고 해체된다.
진실의 폭로를 통한 가치관의 해체는 시의 중반에 가서 절정을 이룬다. ‘간단’이 ‘사랑’이 되는 순간, 진정한 혁명을 위해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 순간이 바로 그렇다. 김수영은 불꽃처럼 한 번에 타오르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난로위에 주전자 물을 조절하듯이 ‘절제’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역설한다. 그렇기에 때로는 불기운을 누그러뜨리고 숨을 고를 줄 아는 것도 사랑의 불씨를 간직하기 위한 배려(‘간단도 사랑)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을 만드는 기술은 자연스럽게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 혁명의 기술로 이어진다.
우리는 언제나 혁명을 불꽃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모든 것을 불태워서 재로 만들고 그 재를 거름 삼아 새로운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래서 4.19와 6월 항쟁을 통해 거리를 불태웠고, 사람들을 불태웠으며, 나라를 불태웠다. 그러나 그 불길이 지나간 뒤에 무엇이 남았는가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혁명이라는 것이 과연 불꽃같아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김수영은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충격을 준다. 혁명은 결코 단번에 성취될 수 없으며, 혁명의 시초를 배반하는 숱한 반혁명을 통해 혁명은 단련된다는 것, 마치 귀추를 알 수 없는 최초의 사랑을 집어삼키는 욕망에 의해 사랑이 단련되는 것과 같이역사를 바꾸는 혁명도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변주곡’이라고 김수영은 말한다. 사랑을 잃고서 첫사랑의 환희만 되뇌는 것이 속절없는 일이듯, 혁명의 첫 함성을 되풀이하는 것만으로 미완의 혁명을 이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주전자의 물이 넘치지 않을 만큼 불을 지필 줄 아는 ‘사랑의 절도’처럼, 새로운 역사에 눈뜬 환희를 기나긴 좌절의 시간 속에서도 그 ‘열렬한 사랑의 절도’만큼 내면화할 줄 아는 ‘사랑의 기술‘(’눈을 떴다 감는 기술‘)이야말로 혁명의 불씨를 살리는 지혜이다. 그리고 그런 시간의 역사를 통해서만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 ’아름다운 단단함‘으로 옹글게 여무는 것은 자연사와 인간사를 아우르는 이치인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단단함’은 ‘광신’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고요한 사랑’이 된다. ‘고요한 사랑’은 불꽃처럼 단 번에 타올랐다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사랑과는 다르다. 이것은 오랜 시간동안 존재의 뿌리를 흔드는 고된 시련들을 고스란히 견뎌낸 ‘진정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통해 ‘위대한 도시’에 둥지를 틀 수 있으며, ‘미대륙’으로 대변 되는 적대적인 세력들을 몰아낼 수 있고, 마침내 혁명의 축배를 들 수도 있는 것이다.
김수영 시 전집의 첫 장을 보면 ‘시는 나의 닻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처럼 김수영의 시는 나로 하여금 내면의 바다를 닻으로 한없이 파고 내려가게끔 한다. 내면의 깊은 곳, 그 심해에는 차마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할 정도로 추악한 것들도 있고, 피가 줄줄 흐를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욕망의 입에서 사랑을 꺼내어 볼 수 있는 용기, 간단도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 광신 앞에서 고요함을 유지 할 수 있는 용기가 이 세상의 진실을 볼 수 있게 한다.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