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스마르크의 사상적 기반
3. 비스마르크의 국내정치
4. 통일·외교정책
5. 결론 - 비스마르크는 현실주의자인가, 이상주의자인가
어린 시절 비스마르크는 학교에서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어머니와 함께 살며 베를린에 있는 김나지움(독일의 9년제 중등학교)에 다녔고 김나지움을 마친 뒤에는 괴팅겐대학교에서, 이어 베를린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대학에서 그는 당시의 저항적이고 낭만적인 입장을 취하였고, 잠깐 동안은 급진적인 브르센샤프트 운동 브르센샤프트란 1815년 해방전쟁에 의용병으로 참가했다가 돌아온 학생들이 새 시대에 알맞은 학원생활을 확립하기 위해 예나대학에서 결성한 독일의 학생동맹으로, ‘젊은이들의 모임’, ‘학생조합’을 뜻한다. 명예·자유·조국을 기치로 내걸고 모든 학생의 대동단결을 지향한 우호수양단체로, 애국자 얀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결성되자마자 순식간에 각 대학으로 번져 나갔다. 1817년 10월, 종교개혁 300년 기념과 라이프치히의 전승축하(戰勝祝賀)를 겸한 축제가 바르트부르크에서 개최되었을 때는, 각지에서 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고, 이듬해에는 전국적 연합체로까지 성장하였으나 동시에 자유와 통일을 지향하는 정치적 경향이 강해지면서 급진적 분파들도 생겨나 와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결국, 바르트부르크 축제 때 일부 학생들이 행한 분서사건(焚書事件)과 그 후에 일어난 한 학생의 반동문인 암살사건을 계기로 K. 메테르니히의 탄압(카를스바트의 결의)이 심해지면서 괴멸하고 만다. 7월 혁명 후 다시 조직되어 1833년 4월, 일부 학생들의 난폭한 행동 때문에 가혹한 탄압을 받기도 했지만, 1848년 혁명 때에는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열정적인 삶을 살고, 술과 결투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학업을 경멸하는 데 반해, 역사와 독일 고전을 방대하게 읽었다. 모범생은 아니었으나 그는 졸업시험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아헨 시 사법관이 되었다. 그러나 25세 때 사직하게 되는데 혹자는 이것이 그가 법 관료직의 권태로움과 기강에 분개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연애사건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그 이후에도 삶에 지루함을 느낀 그는 방종한 생활에 빠져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친 비스마르크"라는 악명까지 얻게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굉장히 무자비한 것으로도 악명이 높은데 이러한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친구와 사냥을 나갔다가 커다란 회색 곰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의 친구는 달리기로 곰을 앞지를 방도는 없지만, 죽은 척을 하면 곰이 그냥 지나가 버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비스마르크는 신발 끈을 조이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가 놀라자 비스마르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끈을 마저 조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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