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 속의 전쟁
들어가며
정묘,병자 호란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 겨우 30여 년 만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결과론이지만 과연 호란이 조선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일방적 전쟁이었을까.
명, 청 교체기 조선의 외교 처세는 적절하였는가. 실리 vs 명분
북벌론의 허와 실
조선과 여진
조선은 건국 초기 북방의 여진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북방의 영토를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까지 확장 할 수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여진족을 미개한 개, 돼지로 비하하고 있으며 다스리고 다독여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인식은 호란 이후까지 이어진다.
조선 초 여진에 대한 정책은 적극적이었으며 조선은 여진의 상국으로 확고히 자리했다.
명의 쇄락과 후금의 건국
송 시절 아골타의 금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던 한족은 여진족에 대하여 철저한 분열정책을 실시하여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게 함.
여진은 건주, 해서, 야인 여진으로 분류되고 또 몇 개의 부로 나누어진 부족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
또한 척박한 땅에 거주하여 생필품 부족을 겪는 여진족의 특성을 이용하여 경제권을 적절히 이용함 - 청이 지정한 장소에서 청이 허가한 사람만이 교역을 할 수 있었음.
누르하치의 조부와 부친은 명의 북방 사령관이었던 이성량의 충복이었다. 왕고의 난을 진압하던 과정에서 아군인 명군에게 부조가 모두 살해 되었다. 누르하치는 그 대가로 받은 칙서 30통을 기반으로 부를 축척 함
1589년 부조의 복수를 명분으로 건주 여진의 부족을 통일함. 이성량은 여진족 패자의 등장을 예감하고 조정에 건의하여 “용호장군(龍虎將軍)”으로 임명하고 명의 관직으로 끌어들여 견제하려 하지만 실패함.
누르하치는 유연한 외교정책을 펼쳐 강국인 명의 견제를 최소화하고 여진은 물론 몽골까지 흡수했다.
누르하치에게 임진왜란은 큰 기회였다. 건주 여진족의 통일을 우려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견제하던 명의 역량이 조선으로 집중됨에 따라 후금 건국을 위한 내실을 다질 수 있었다.
1613년 예허부를 제외한 여진족을 모두 흡수하여 사실상 여진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1616년 대금을 건국하고 스스로 칸(汗)의 지위에 오른다.
팔기체계의 완성
팔기제는 군사제도임과 동시에 사회를 아우르는 사회, 정치제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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