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리더쉽-
1 집단의 활동을 공동의 목표로 지향케 하는 개인 활동
2 기대와 상호작용 속에서 조직을 주도하고 유지하는 것
3 한 사람이 어던 종류의 정보를 제공하고 다란 사람이 그에 따라 행동하면 그 결과가 개선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사람들간의 상호작용
비전과 영향력
당대 도참(圖讖)의 제일인자였던 도선(道詵)이 지나가다가 “이곳에서 성인이 나시리라”라고 외치고는, 융에게 “내년에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귀띔했다. 도선은 왕건이 17세 때 다시 찾아와 “너는 장차 왕이 될 운명이다.”라고 알리고, 병법과 각종 술법 등을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은 왕건의 가문은 송악 일대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예성강 일대에서 강화도까지 이르는 지역에 튼튼한 세력기반을 구축했다. 이런 강력한 해군력과 재력을 갖춘 왕건 가문과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세력을 떨치던 궁예가 896년에 손을 잡음으로써, 후고구려(고려)는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기반을 갖고 출발할 수 있었다
대권에 야망을 가졌던 왕건은 내직보다도 전장을 통해 군부를 장악해갔다. 궁궐에 신라 6두품 계열이 주류를 이룬 실무 관료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심어 놓았고 “천명설”을 통해 민심을 움직이게하며 세력 확장과 백성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작을 펼쳤다
선택과 실행
왕건의 쿠데타는 매우 오래 전부터 준비해왔다고 볼 수 있다. 왕건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감싸 안는 포용력으로 궁예나 견훤에 비해 카리스마는 떨어지지만 포용력으로 이를 커버하며 군부 장악과 민심을 얻으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왕건은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박술희 등과 모의하여 918년에 궁예를 내쫓고 고려의 주인이 되었지만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통일전쟁에서 한 발 물러서면서까지 흐트러진 기강과 민심잡기에 노력했다.
그 후에도 왕건은 오랜 라이벌 견훤을 상보(尙父, 왕이 아버지와 같을 정도로 극히 존경하는 신하)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하고, 경순왕도 경주의 사심관으로서 계속 경주를 다스리게 하고는 그의 조카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장인 대접을 하는 등 화해와 통합에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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