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교육의 기점 연구
이 연구는 근대교육의 기점 설정에 있어서 근대교육의 각 준거틀을 분석하여 그것이 우리교육의 전개과정, 나아가 교육사관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정재걸은 그 시점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그리고 각 시기를 검토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근대교육의 준거에 대한 논의와 함께 서구의 근대교육의 준거를 제시한다. 여기에 보편성과 특수성을 구비한다면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의 준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만, 교육내용의 근대성에 있어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있다고 해석하며 논문을 결론짓고 있다.
이 논문에서 연구자가 제시한 세 가지 시점은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제학당을 기점으로 하는 것과, 1883년 원산학사, 18세기 후반 서당, 일제 조선통감부 설치 이후 등 이다.
첫째, 배재학당설에 대한 검토이다.
오천석은 배재학당의 근대적 교육 성격에 대하여 교육사상적인 측면과 교육운영방침을 말한다. 교육사상적인 측면은 배재학당의 학당훈인 ‘欲爲大者當爲人役’에서 찾는다. 이는 성경의 한역으로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교육운영방침으로는 6가지를 제기하며 구교육과는 구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연구자는 우리의 근대교육을 담당한 가장 큰 기독교계 학교는 그 종교적친미적 요소 때문에 민족적 주체성의 형성을 일정부분 왜곡하였다고 반박하고 있다.
둘째, 원산학사설에 대한 검토이다.
신용하는 근대교육으로 원산학사의 설립의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5가지로 밝히고 있다. 첫째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가 종래의 통설과 달리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손으로 설립하였다는 사실의 역사적 의의이다. 둘째로, 정부의 개화정책에 앞서 민중들이 기금을 설치, 자발적으로 학교를 설립하였다. 셋째로, 개항장에서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신지식을 교육하려는 애국적 동기로 근대학교 설립하였다. 넷째로, 모방이 아닌 종래의 교육기관인 서당을 개량서당으로 발전시켰다가 다시 근대학교로 발전시켰다. 다섯째로, 개화파 관료와 민중의 호흡이 일치했다. 신용하의 원산학사설은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는 데 기여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연구자는 신용하의 인용 근거에서 ‘근대성’ 준거에 문제점을 지적한다.
셋째, 18세기 서당설에 대한 검토이다.
정순우의 주장은 우리나라 자생적 근대교육의 맹아를 봉건교육의 해체라는 내부 요인에 두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보편성을 갖기 위해서는 서당교육의 변모에 대한 체계적인 증거수집과 자료 확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근대교육의 준거에 대한 논의에서 연구자는 근대교육의 준거로 4가지를 제시한다. 이는 교육기회의 보편화, 교육의 세속화, 교육의 민족주의화, 교육내용의 근대성이다. 이를 통한 각각의 주장에 대하여 만족할 만한 답을 구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 논문의 문제의식은 근대교육의 기점 설정이 갖는 의미는 교육사의 서술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위의 요소 중 어느 것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교육의 모습은 차이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자가 제시한 세 가지 설에 대한 검토는 각각의 문제점과 긍정적인 면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교육 준거 4가지 중 이것을 만족시키는 것은 배제학당설이라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연구자는 우리 민중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사적 해석이 없다는 이유로 배제학당설을 가차없이 제외하는 느낌이 들었다. 근대교육의 기점에 1894년 갑오개혁 시 신교육제도 도입이라 던지, 1895년 교육입국조서 등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근대교육의 기점이 교육사에 중대한 영향이 있다면 좀 더 설득력 있는 문제의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다. 근대교육의 기점은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앞으로도 계속 찾아 나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기점을 찾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교육 현실을 직시하고 반성하고 앞으로의 역사에 얼마나 기여할 지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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