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코메니우스의 생애 오춘희(1998: 23-32) 참조.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는 1592년 3월 28일 모라비아의 니브니츠(Nivnitz)에서 태어났다. 그는 1603-4년 사이 페스트로 부모를 여위었다. 그래서 그는 1604년 헝가리 국경 근처의 스트라즈니츠(Straznitz)의 고모 집에서 살게 되었고, 그곳에서 형제교단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1605년 전쟁으로 그 도시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수공업을 배우며 몇 해를 보내게 되었다.
그는 1608년에 형제교단이 운영하는 프르제로프(Perov)의 라틴어 학교에 입학해서 라틴어 교육과 종교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목사후보로 선발되어 1611년 헤르본 대학과 161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했다. 이 두 학교에서 그는 신학과 새로운 과학적인 지식과 기계와 기술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1614년 조국으로 돌아와 자신이 다녔던 라틴어 학교의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1616년 목사안수 후 그는 북모라비아 지방의 풀넥(Fulnek)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부설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가 결혼한 해인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1628년 형제교단 사람들과 함께 폴란드의 레즈노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 교사로 일하게 되었고, 모국어가 다른 학생들을 함께 가르쳐야 했기 때문에 언어 교수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의 노력은 1631년 『언어의 열린 문(Janua linguarum reserata)』으로 나타났다. 이 책으로 그는 전유럽에 알려졌다.
그는 학교에서 언어만이 아니라 사실(realia)에 대하여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연학의 교과서로서 전체적인 교육을 다루는 『교수학(Didactica)』을 체코어로 썼다. 이것이 나중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1657년 『대교수학(Didactica Magna)』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1632년 라우렌베르크(Peter Laurenberg)의 『범지학(Pansophia)』을 읽었다. 그러나 그는 이 책에 대하여 실망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범지학이라는 제목과는 다르게 신앙적인 요소가 없어서 보편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 범지학’(Pansophia Christiana)을 구상했다.
1632년 영국으로 유학 간 형제교단의 학생들에 의해 그의 교수학적 저술과 범지학이 영국에 알려졌다. 그곳에서 그의 명성은 높아졌다. 그 결과 그는 1641년 10월 영국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내전으로 그는 영국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스웨덴의 교육개혁을 해달라는 드헤어의 초청을 받아들여 1642년 여름부터 6년 동안 당시 스웨덴의 영토였던 발틱해 연안의 엘빙에서 교과서들과 교수학 이론을 저술했다. 그곳에서 『최신 언어 방법(Linguarum methodus novissima)』이 완성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 조약에 의하여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의 영토로 인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정치적인 발판을 잃어버렸다. 그는 1648년 레즈노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형제교단의 제일 주교가 되어 형제교단을 통솔하게 되었다.
오춘희(1998). 코메니우스. 연세대학교 교육철학연구회(편). 위대한 교육사상가들 II. 서울: 교육과학사.
이근엽(1992). “코메니우스의 인본주의 사상과 인간관”, 교육철학 제10호, 교육철 학연구회,, 127-140.
정영수(1992), “근대교육에 있어서 코메니우스의 위상”, 교육철학 제10호, 교육철 학연구회,, 169-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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