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을 통해 본 조선시대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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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당을 통해 본 조선시대의 교육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조선왕조가 우리나라 역사의 500년을 차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체계적이고 깊은 교육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조선의 교육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서당교육에 대해 기원부터 쇠퇴까지 자세히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교육이 역사와 현실에서 가질 수 있는 의미와 앞으로의 교육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가야할지 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Ⅰ.서당의 기원
고구려에서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워 관학교육(官學敎育)의 출발로 삼는 한편, 민간교육기관으로서 경당(堂)을 두었다. 중국의 사료(史料)인 ≪신당서 新唐書≫와 ≪구당서 舊唐書≫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책을 사랑하여 벼슬아치 집에서 평민의 집에 이르기까지 저자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경당에서는 문무겸비의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이는 신라의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교육기관인 동시에 청소년들의 결사조직체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지닌 맹점은 경당의 사회적인 역할이 과연 어느 정도로 서당의 사회적 역할과 일치하였는가를 명확히 해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앞으로 경당에 대한 정밀한 성격규명이 있은 다음이라야 서당과의 상호 동질성과 이질성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신라에서도 설총(薛聰)이 경서(經書)를 이두로 풀어서 제생(諸生:여러 학생)을 가르쳤다고 하였으니, 그가 가르친 곳이 사숙일 가능성이 짙고, 이 또한 서당교육의 연원의 하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는 경관(經館)과 서사(書社)라는 서당 형태의 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에는, “여염집들이 있는 거리에는 경관과 서사들이 두셋씩 마주 바라보이고, 이곳에 백성의 자제들이 무리로 모여 스승에게 책〔經〕을 배우며, 조금 장성하게 되면 뜻이 맞는 사람끼리 벗을 택하여 절간으로 가서 글을 익힌다. 그리고 아래로는 코흘리개 어린이까지도 역시 향선생(鄕先生)에게 배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은 고려시대도 이미 조선시대의 서당제도와 같은 민간교육기관이 존재하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해 주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Ⅱ. 서당의 발달
서당의 사회적 의미가 증대한 것은 16세기 사림파의 등장과 시기를 같이 하는 것으로, 중종대 사림파의 향약보급운동과도 일련의 연관성을 지닌다. 16세기 서당 설립의 주도 세력은 대부분 당시 향촌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던 명문사족 출신인 대토지 소유자였다. 예를 들면, 안동의 의성 김씨 가문, 고평의 청주 정씨 가문, 의성의 함양 박씨 가문 등이 그 전형적인 사례들이다. 당시 서당 설립의 주도 세력의 신분은 입사(入仕:벼슬한 뒤에 처음으로 그 벼슬자리에 나감) 이전의 생원·진사들이 주류였고, 설립의 명분은 대체로 반상(班常:양반과 상사람) 구별을 비롯한 유학적 질서율을 향촌사회에 정착시키려고 하는 데서 찾고 있다. 서당의 교육내용은 고급 성리서(性理書)를 위주로 하거나 과거응시를 목적으로 하는, 이른바 고제적 서당(高弟的書堂)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서당의 설립은 관(官)의 지원을 최대한 배제하고, 경내 백성들의 공동체적 일체감 속에서 민간자산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양란 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사족들은 약화된 재지기반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서당을 중심으로 관권 및 외부 사림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향리세력들이 향청(鄕廳)의 주도권을 위협하는 가운데 그들 사림들은 관권과 결합하여 서당을 설립하고, 수령을 직접 서당에 초치(불러서 이르게 함)하여 향민들을 대상으로 강회(講會)를 열고 상벌을 시행하기도 하여 향촌기반 구축에 부심하였다. 관변측(官邊側)으로서도 향교와 서원을 통한 향촌사회 통제에 한계성을 인식하고, 서당 설립 및 운영을 적극 지원하였다. 예로 평해(平海)에 설립되었던 소곡서당(蘇谷書堂)에 대한 조정 상신들의 지원과 수령의 운영은 서당 장악을 통하여 향권(鄕權)에 대한 관권(官權)의 우위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기도 하였다.
송준길의 〈향학사목 鄕學事目〉 및 당쟁의 정점에서 부침하던 홍여하 및 박세채의 서당 설립과 운영은 당시 집권세력들의 향촌기지 구축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17세기에도 사족이 연합하여 서당이 설립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서당 설립과 운영은 다음 18세기적 양상과 같이 혈연 위주의 폐쇄적인 양상이 대종을 이루지는 않았다. 다수의 씨족이 몇 개의 자연촌을 대상으로 서당을 설립하였던 사례들이 이 시기에 나타난다. 당시 서당 설립 목적 중의 하나는 사회신분제의 동요를 억제하고, 엄격한 신분적 차등윤리를 향촌사회에 정착시키는 데 두는 것이었다. 또한 17세기까지는 아직 중인층을 비롯한 비사족(非士族) 계층이 서당 경영의 주체로 등장하지 않았다. 이것은 향후 18세기 후반기에 대두되었던 비사족 중심의 서당경영 및 서당교재 출현, 서당 훈장층의 민란참여 현상과 같은 중세적 신분제 사회 해체 현상이 심화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에 서당은 종손(宗孫)을 중심으로 한 종중(宗中)의 공동관리하에 두게 되었으며, 강학(講學)기능 이외 보족(保族)과 의가(宜家)를 위하여 문중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집행기능도 동시에 수행하였다. 특히 18세기 말 이래 서당에는 각 문중이 그들의 신분유지를 위하여 선조에 대한 향사(享祀:제사)기능을 두기도 하였다. 서당의 향사 대상은 선조 또는 종족(宗族)의 비조에 한정하는 가묘적 성격이 강하였다. 향사 인물이 문중 위주·혈연 위주로 한정됨에 따라 서당의 명륜교육도 가정윤리인 효(孝)의 문제로 축소되어 충(忠)과의 연계성을 위협받게 되었다.
또한 향사하기에 부적합한 인물을 향사함으로써 범사회적인 승인 및 통일성 확보에도 문제점이 뒤따랐다. 그러나 18세기에 설립된 동족마을 중심의 서당은 문약(門約)·동약(洞約)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운영됨으로써 마을 단위에 의한 경제적 지원을 확고하게 보장받을 수 있었다. 동족마을이 중심이 되어 서당을 자치적인 경제권 하에 편입시키자 서당 운영에 대한 관권개입이 전반적으로 퇴조하고, 서당의 역할은 혈연 중심의 폐쇄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소규모의 자산으로도 운영이 가능한 서당계(書堂契)의 고안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평민층이 대거 서당을 운영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 밖에도 이 시기에는 평민 중심의 교재가 본격적으로 선보이고, 직업적 고용훈장이 등장하는 등 서당교육의 일대변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Ⅲ.서당의 종류
서당은 사립의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설립에 필요한 기본재산이나 법적인 인가를 요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존폐가 자유로웠으며, 필요에 따라 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서당을 유지, 경영할 수 있었다. 서당의 종류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사숙 또는 독서당(讀書堂)의 유형이다. 대개 문벌가나 유력가가 그들의 자제교육을 위하여 훈장을 초빙하고 교육경비를 부담하는 형태이다. 이들 훈장은 퇴관 지식인이거나 불우한 낙방거자(落傍擧子)들로서 지식 정도나 경륜이 높은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사숙 형태의 서당에는 그 가문의 자제와 일가친척의 자질들이 무료로 글방 벗이 되어 ‘동냥공부’ 또는 ‘어깨너머 공부’를 하는 수도 있었으며, 이따금 가숙용 교재를 개발하거나 간인(刊印: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는 학사(學事)를 담당하는 유사(有司)가 선출되어, 훈장에 대한 급여를 포함하여 기본재산의 관리를 맡았다. 또한 동계서당의 강당은 때로 문중의 회의장소로 활용되었으며, 향풍(鄕風)을 규찰하는 간이재판소의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 훈장은 직업적인 유랑지식인이거나 마을의 유식한 촌로 가운데서 초빙하거나 선택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대우는 양식으로 쓸 쌀과 땔나무, 그리고 의복 정도였다. 일반 학부형이 염출하는 학자(學資)는 따로 없었지만, 독서 수료시에 이른바 ‘책걸이’라는 간소한 잔치를 베풀거나 계절에 따른 별식이 수시로 공궤(供饋:음식을 줌)되었으며, 하과(夏課)라는 계절학습에서는 집집마다 별도의 과외수업비를 내기도 하였다.
두 번째는 훈장의 자영서당(自營書堂)이다. 훈장 자신이 집에서 생계유지나 소일을 위하여 개설한 서당이다. 이들은 촌학구(村學究) 또는 궁생원(窮生員)이라고 불릴 정도의 훈장이 대부분이어서, 교육하는 일 외 마을의 대서(代書)를 전담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유형의 자영서당은 이름난 고관이나 학자들이 만년에 자연을 벗하면서 후진을 가르치는 서당 또는 정사(精舍)와는 구별된다.
마지막은 문중연립서당(門中聯立書堂)이다. 이는 문중(동계)서당의 확대형으로서 지체가 비슷한 마을끼리 그 향촌사회에서 덕망과 학식이 뛰어난 스승을 모시고, 각 마을의 재능있는 청년 자제를 선택하여 교육시키는 고급서당이다. 이는 통혼권(通婚圈)이 같은 집안끼리 그 유대를 더욱 두텁게 하는 한편 같은 사문(師門)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키려는 교육문화적인 의도에서 설립된 서당이다. 교육장소로는 인근의 서원을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서당교육과 서원교육이 연결되는 성격을 지녔고, 이들의 교육기간은 연중 개설학교가 아니라 거접(居接:잠시 몸을 의탁해 거주함) 또는 하과와 같은 특별교육활동이 주된 것이었으며, 교육대상은 서원의 ≪원유록 院遊錄≫(일명 靑襟錄)에 올리기 이전 연령의 청소년이었기 때문에, 양반사회 진출을 위한 일종의 예비학교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