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각각의 목적이 있는데 이 여러 가지 목적들 간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활동 자체가 목적이 될 수도 있고, 성과가 목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몇 가지 기술이 하나의 능력 밑에 종속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모든 경우에서 가장 으뜸가는 모든 목적에 의해 추구되는 것은 대체로 누구나 같은 답을 내린다.
인간의 모든 행위의 목적은 행복이다. 행복은 목적 중에서 제일가는 목적이며, 선 중에서도 첫째가는 선이다. 그가 말하는 행복은 덕에 입각한 활동이다. 행복은 곧 잘산다는 것이요, 그 어떤 것의 수단도 될 수 없으며 그 자체로서 목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행복이라는 것을 사람들마다 각기 다른 견해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때로는 동일한 사람일 지라도 상황에 따라 행복을 다른 것으로 본다. 어찌됐건 우리는 언제나 행복을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어떤 것 때문에 그것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다른 목적들을 통해서 행복하게 될 것 이라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선택하기는 하지만 다른 것들을 위해 행복을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요즘 ‘웰빙’ 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과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중용의 덕을 가지는 것이 행복이라고 한 것이다.
모든 생명체에는 세가지 기능이 있는데 식물에게도 있는 영양 섭취와 생식의 기능을 ‘식물혼’ 이라고 하고 감각과 욕구의 기능을 ‘감각혼’ 이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이성과 사유의 기능이 있는데 이것을 ‘이성혼’ 이라고 한다. 동물은 그런 식물혼에 감각혼을 덧붙여 갖고 인간은 식물혼에 감각혼을, 다시 이성혼을 덧붙여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이란 덕에 일치하는 현실태, 곧 이성의 기능을 완전하게 발휘하는 삶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봄이 되는 것은 아니며, 하루의 실천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크게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나누었는데 지적인 덕은 교육에 의해 발생하기도 하고 성장하기도 함으로 이는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다. 이는 본성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또한 본성에 반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며 우리가 본성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되어 있어 습관에 의하여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도덕적인 덕은 습관과 단련을 통한 지속성이 요구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하려면 중용의 덕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중용의 덕을 매이 실천하여 몸에 배일 정도가 되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억지로 중용의 덕을 실천해서는 부족하며 갈등과 고민 없이 자동적으로 중용의 덕을 실천할 수 있을 정도의 습관과 단련이 필요하다.
중용이란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이성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조화롭게 발휘하는 것이다. 욕구나 감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을 일치시킬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용기는 좋은 것이니 덕이지만 용기가 부족하면 비겁한 것이 되고 용기가 지나치면 만용이 된다. 비겁도 만용도 아닌 용기가 바로 중용의 덕이다.)
“인간은 폴리스적(정치적, 사회적)동물이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중용의 덕은 혼자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필요하지 않다. 혼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야수나 신이다. 그만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 하였는데 중용의 덕은 국가 속에서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이다. 중용의 덕을 실천하며 국가 속에서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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