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라구니요시팔대 교육 주장 창조 교육론이 나게 긴 시 치

 1  오바라구니요시팔대 교육 주장 창조 교육론이 나게 긴 시 치-1
 2  오바라구니요시팔대 교육 주장 창조 교육론이 나게 긴 시 치-2
 3  오바라구니요시팔대 교육 주장 창조 교육론이 나게 긴 시 치-3
 4  오바라구니요시팔대 교육 주장 창조 교육론이 나게 긴 시 치-4
 5  오바라구니요시팔대 교육 주장 창조 교육론이 나게 긴 시 치-5
 6  오바라구니요시팔대 교육 주장 창조 교육론이 나게 긴 시 치-6
 7  오바라구니요시팔대 교육 주장 창조 교육론이 나게 긴 시 치-7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오바라구니요시팔대 교육 주장 창조 교육론이 나게 긴 시 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강당을 가득 채워주신 여러분들과 한자리에서 만나 교육 연구를 하게 된 것은 저에게는 참으로 영광이고 행복한 일입니다. 특히 “한 치의 벌레에도 영혼이 절반” 一寸のにも五分の魂(いっすんのむしにもごぶのたましい) : 一寸のにも五分の魂とは、小さく弱い者にも、それ相の意地や根性があるのだから、どんな相手でも侮ってはならないというたとえ。 故事ごとわざ辭典 http://kotowaza-allguide.com/i/issunnomushinimogobu.html
이라는 말이 있듯이, 불초한 저의 교육사상의 일각(一角)에 관하여 어쨌든 교육이라는 주의주장을 내걸고서, 언제나 열심인 교육가 여러분들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현대교육자의 틀을 벗어났다고 말해도 좋을 본 대회에서 평소에 생각하고, 믿고, 요구해왔던 교육에 대한 자기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며 간절하게 지도와 엄정한 비판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본 대회의 간부 및 회원 여러분들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미리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하면, 어떤 하나의 주의나 주장, 학설을 요해(了解)하고 비판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일뿐만 아니라, 무릇 교육의 주의주장학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타당한 비평을 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누구라도 한번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주의’에 대하여 요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본 대회의 우리 교육 모임이 독자적인 가치를 갖는 까닭은 이 단상에 선 불초한 저를 말석으로라도 포함하여 강연자 모두가 명백한 주의, 선명한 주장을 내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본 대회에 기대하는 바도 역시 잡지나 저서에 많은 의견이 발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이러한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이번 저를 하나의 인간으로서 밑으로부터 위로부터, 혹은 아래위로, 또는 앞으로부터 살펴보시는 까닭도, 혹은 저 이외에 각 강연자를 비교해 보시는 까닭도, 오로지 단순히 우리들의 [#54] 사상 내용에 관하여 이해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있는 인격으로서, 또 인격의 저 밑바닥 중심으로부터 생성되어지는 주의주장학설을 있는 그대로[坐ながらに]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저뿐만 아니라, 다른 강사 분들을 대하실 때에도 주의에 관해 올바로 이해하시고, 학술에 관한 명확한 이해를 갖지 못하신다면, 이 모임의 효과는 흐려지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제가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우선 먼저 이 점을 저 자신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떠한 신념을 갖고서 자시의 사상학설을, 구체적으로 펼친다면 창조 본위의 교육관, 짧게 말하면 창조교육을 제창하게 되었는가하는 이유, 즉 저 자신의 사상학설을 제창하는 근거를 하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에 의하면, 사람이 살아가는 인생의 인간 이외의 존재 혹은 인생 이외의 현상과 취향을 달리하는 것으로 가장 큰 특색은 무엇일까 말해 본다면, 여러 가지로 형용하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각적(自覺的)이라고 말하며 설명하는 것도 꼭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믿는 바에 의하면, 인간은 자각적 존재이며 인생은 자각적으로 꾸려나가는 것입니다. 가치적 존재라고 하고, 혹은 가치적 현상이라고 하는 것도 전적으로 자각적이라는 점에서 논단(論斷)하여 부수적으로 생겨난 특색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이러한 견해가 하나의 진실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 자각적인 존재인 우리 인간이, 인간 전체를 통해 자각적인 인생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다시금 자각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현상, 즉 교육은 충분한 의미를 갖고 있는 자각적 현상이며, 따라서 이를 연구하는 교육학자도 이를 실행하는 실제 교육자들도, 모두 투철한 자각을 갖고, 자기에 대하여, 자기의 직무에 대하여 자기가 맡고 있는 직무의 의의와 가치를 자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우리들이 교육연구가로서 가치 있는 생활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우리들이 교육실제가로서 의의 있는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독자의 우수한 주의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주의 없는 곳에 인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말하고자 하는 주의란 무엇인가, 이 점에 관하여 상세하게 말씀드린 기회가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만, 결론만을 말씀드리면 주의란 인격, 생활, 사상, [#55] 행동의 통솔원리, 혹은 오늘날의 표현에 의하면 통제원리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이 교육의 연구자로서 하나의 주의를 표방하는 근거가 이 점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그 의미에 있어서 주의가 참으로 가치가 있도록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요? 저는 이 점에 관하여 주관적객관적 양면에서 고찰하여 설명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관적 [역자주] 원문에는 ‘객관적’이라고 되어 있지만, 문맥상 주관적의 오류라고 생각되어 수정함.
조건부터 설명드린다면, 비록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의는 인격, 생활, 사상, 행동의 통솔원리입니다. 한마디로 인격 그 자체이며, 생활 그 자체입니다. 주의는 인격, 생활사상, 행동의 통솔원리이며, 그리하여 통솔원리는 통솔되는 것에 존재하는(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의인격생활의 중심 정수(精髓)가 아니면 안되는 것이며, 주의에 준한다고 예전부터 말하고 있으며, 그것에 따르지 않는 것은 자기의 목숨을 바칠 수 없는 주의는 참된 주의라고 말하기 부족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들의 주위를 돌아볼 때에 얼마나 주의의 제창이 많으면서도 얼마나 참된 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이 적은지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의는 단지 제창하고 받들기만 하고, 혹은 장난감처럼 완롱(玩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에 (목숨 걸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의는 곧 인격의 표명[원문은 ‘表白’: 생각이나 태도를 드러내어 밝힘)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의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저의 표현으로 말씀드리면 주의는 창조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창조라고 하는 것은 상상(想像)이 아니라 참된 의미에서의 창조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 저를 비롯하여 그 밖의 사람들이 주의주장학설사상을 제창하고, 혹은 역설고조(高調)할 경우에, 그러한 주의를 주장하는 사람과 인격과 그 주의와의 사이에 어느 정도의 필연성이 있는가, 차용한 것은 아닌가, 거짓된 것(まやかしもの)은 아닌가, 참으로 인격의 원천으로부터 솟아난 주의인가 여부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하여 저는 교육상 창조주의를 제창하는 자입니다만, 이 주의에 저의 인격생활과의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있다고 스스로는 불초(不肖)하지만 믿고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 부디 여러분들의 고명한 비판을 바라마지 않습니다.
둘째로는 이른바 객관적 조건입니다. 개인생활상 주의는 한 개인을 훌륭하게 하는 것으로, 주의를 갖고 있는 사람[懷抱者], [#56] 주장자는 그 사람의 인격생활의 통솔원리라고 한다면 그것으로 좋습니다. 그러나 교육 혹은 객관적인 생활 즉 윤리사회정치철학 혹은 문예처럼 주의의 봉지자(捧持者)제창자만의 인격, 혹은 생활 혹은 사상 행동을 규율할 뿐만 아니라, 자기 이외의 단체나 사회, 국가, 세계와 같이 객관적 세계를 통솔하는 데 필요한 원리라고 한다면, 단순히 주의의 봉지자제창자의 인격을 통솔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만으로는 참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직역: 가치 있는 주의를 근거로 면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말하고자 하는 객관적 조건이란 무엇일까. 바로 통솔되는 대상의 전체를 근저(根)에서 통솔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교육에 있어서 주의 혹은 교육상의 학설이라고 한다면, 취급되는 바의 대상 즉 교육 전체를 포괄하고, 전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나의 표현으로 말씀드리면 전체를 근저적으로 통솔하는 것이 없다면, 주의로서의 가치가 절대로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부당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교육의 주의 혹은 학설을 주장할 때에, 단지 교육의 방법의 통솔원리라고 하든가, 혹은 수신 교수의 통솔원리라고 하든가, 혹은 체육 그 밖의 어떠한 통솔원리라고 하는 식으로, 교육의 자그마한 방면만을 통솔하는 원리를 중심으로 할 때에는 교육전체를 통솔하는 데에는 외부의 주장을 빌려오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따라서 원리라든가, 통솔을 말하는 데에 모순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불초한 저는 혼자 만든 일파의 교육주의, 즉 창조교육을 제창할 때에는 이러한 점을 고려하였습니다만, 주관적 진리가 반드시 객관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기에, 저의 생각에는 과연 타당한 것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혼자 만족해하는 무리들이 결코 적지 않으며, 과대망상적인 인간도 상당히 많습니다. 오늘 제가 여기에 서게 된 한 가지 이유는 내가 필요하다고 믿는 바의 이 조건에 나의 교육주의, 즉 창조교육이 적확하게 합치하고 있는가 여부를 총명하고 열성을 가진 여러분들에게 엄정한 판단을 구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각오, 이러한 이해, 이러한 태도에서 저는 감히 천하를 향해 창조교육을 제창합니다. --- 이제 서서히 본론에 첫 걸음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창조교육 나름의 특색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오늘날 교육의 주의주장은 상당히 [#57] 많이 있습니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오늘날 교육학설을 연구해 보면 70-80여 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저는 몇 가지나 되는지 정확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만, 적어도 열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는 점만은 단언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많이 있는 ‘주의’들 중에서, 특히 제가 감히 새로운 설을 세우고, 특히 독자적인[自家] 일개 학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창조교육이 되는 것, 게다가 제가 존경하는 치바 메이키치(千葉命吉) [역자주] 치바는 일체충동개만족론(一切衝動皆滿足論)을 주장함.
도 저처럼 또 다른 형용사가 붙어 있지만, 창조교육을 제창하고 있습니다. 저와 치바와의 학설의 차이가 무엇일까를 알고자 하는 점도 어쩌면 여러분들이 이 모임에 참석하게 된 하나의 특별한 흥미가 아닐까 억측추단(推斷)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