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끼는 제주 사건
서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들어온지 벌써 두 달이 지나 4월이 되었다. 4월에는 날씨도 좋고 놀러가기 좋은 달이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4월은 잊지말아야하는 사건이 있다. 바로 4.3사건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때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 제주 4.3사건에 대하여 중요하게 여기고 평화공원을 갔던 기억이 난다. 어린시절에는 4.3 사건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왜 중요시여기는 지도 몰랐지만 지금부터라도 이 사건에 대하여 똑바로 알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리고 so아라에서 진행했던 4.3사건행사에 참여하면서 관심이 더 커졌다.
본론
-제주 4.3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한 사건을 말한다.
-제주 4.3사건의 배경 및 과정
제주도는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이 귀환하였으나 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여 살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여기에 생필품 부족과 콜레라 발병으로 인한 수백 명의 인명 희생을 당하고 극심한 흉년 등이 겹친데다가 일제에 부역한 경찰들이 미군정하에서 다시 치안을 책임지는 군정경찰로 변신하여 사회적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1절에 경찰이 시위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여 일반 주민이 사망 또는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반정부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여 제주도내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이른바 3.10 총파업에 동참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미군정은 경찰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먼저 남로당의 선동을 분쇄하는 데만 주력하여 제주도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관리자를 전원 외지인으로 교체하였고, 경찰과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의 단원들을 대거 동원하여 진압하였습니다.
이렇게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면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에게 선제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들은 더 나아가 남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급기야 미군정은 경찰력과 서북청년단의 힘으로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자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5월 20일 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하였으며 어이없게도 6월 18일에는 경비대 연대장이 부하 대원에게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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