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요약
2.정묘호란
1627년 후금이 압록강을 넘어오면서 정묘호란은 시작되었다. 조선은 처음에 후금의 군대에 계속해서 패퇴하게 된다. 그러나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후금의 보급선이 차단되는 등 전쟁이 어렵게 되자 조선과 화의를 맺게 된다. 그리고 당시 후금의 주적은 명나라였기 때문에 쉽게 화의는 이루어졌다. 화의를 맺은 후 조선과 후금은 후금의 요청으로 인해 군신관계를 맺게 되고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고친다. 청과 군신관계를 맺은 후 조선의 조정은 척화론과 주화론으로 나뉘게 된다. 청에서는 조선에게 점점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고 청은 오랑캐라는 인식 등으로 인해 척화론이 점점 입지가 강해졌다.
3.병자호란
결국 이에 청나라는 청나라 태종이 직접 12만의 군대를 이끌고 1636년 조선을 다시 침입해 온다. 당시 조선은 의주부윤 임경업이 백마산성에서 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대는 공략하기 어려운 백마산성을 피해 그 곳을 지나쳐 별동대로 공격해 왔다. 이에 조선조정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세자비와 봉림대군 등을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청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해왔다. 특히 조선은 그때 당황하여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진격해 내려오는 청의 군대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결국 인조와 세자도 강화도로 피신하기 위해 성을 나섰다. 그러나 청군의 발 빠른 진격으로 인해 강화도를 가는 길이 막히게 되고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향하게 된다. 인조와 조정신하들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청의 군대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를 하게 된다. 그때 남한산성에는 1만3천의 병사와 50일분의 병량이 있을 뿐 이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청의 군대가 도착해 포위하기를 시작했다. 청의 군대는 포위를 하며 남한산성을 말리기 시작했다. 조선각지에서 왕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말을 듣고 군대가 달려왔지만 청의 군대에 의해 각개격파 당하고 만다. 결국 병량이 떨어지고 군대의 사기도 저하되어가자 인조는 항복을 하게 된다. 청은 왕이 직접 나와 항복을 하라는 요구를 한다. 결국 삼전도에서 인조는 청의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게 된다. 세 번 절을 하고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삼전도 굴욕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청과의 병자호란은 끝이 나게 된다. 청나라는 항복을 받아낸 후 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잡아가고 많은 백성들과 재물을 빼앗아 갔다.
4.그 후 상황
병자호란이 끝나고 조선은 주화론과 척화론으로 나뉘게 된다. 조선은 항복을 한 후 명나라와는 완전히 관계를 끊게 되고 청과 군신관계로 남게 된다. 척화론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배척하고 공격하자는 주장이였고 주화론은 현실적으로 생각해 청의 문물과 학문을 배우고 나라의 안정을 위해 청과 사대관계를 유지하자는 주장 이였다.
이것은 후에 북벌론과 북학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북학론은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등의 실학자에 의해 주장되어지는데 정조 영조 때 주장해 나라의 문물을 많이 발전시켰다.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고 효종은 병자호란 때의 치욕을 되새기며 북벌을 준비한다. 군비를 강화하고 군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인한 피해가 누적되어 있었고 재정 등이 마련되지 않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효종은 북벌에 대한 의지가 강경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였고 결국은 청의 견제와 조선 당시의 현실로 인해 북벌론은 좌절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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