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는 어떠한 종교인가를 읽고
원불교는 시대적 상황을 배경을 토대로 형성된 종교라 볼 수 있다. 현대를 일러 물질 만능의 시대라 하듯, 인간이 발명해낸 각종 물질 문명의 성과는 불과 100년전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발전하여 인간의 많은 일들을 기계가 처리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낸 기계에 얽매임을 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고, 전쟁 무기의 발달로 인한 인류의 불안은 더욱 커가고 있으며, 공업화에 따르는 자연 환경의 훼손과 공해문제는 인간의 생존에 까지 위협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경지를 통해 간파한 대종사는 모든 인간이 정신의 주체를 확립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을 느끼고 쇠약해가는 인류의 정신 구원을 위해 새로운 종교를 세우게 된다. 대종사는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쇠퇴해가는 인간 정신을 회복하고 현실의 모든 고통, 즉 전쟁과 가난과 무지의 질병 등으로부터 해방되어 이 땅에 낙원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렇게 원불교는 조화와 상생의 새 시대에 부응하는 새 종교로 출발하는 것이다.
대종경 서품 2장에 보면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을 석가모니 불에게 정하노라”고 하였으며 장차 새 종교 운동을 할 때에도 불법을 주체로 하는 완전 무결하고 큰 종교를 이룩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대종사는 그 깨달음의 경지가 모든 성현들이 다 같은 것이며 성자들의 목적 또한 인류의 평화와 낙원의 건설에 있다고 보고, 그 가운데 불법의 진리가 가장 크고 원만하다고 생각하여 석가모니의 불법에 연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생각할 때 원불교는 불법에 연원하되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여 독자적인 교리와 신앙 체계, 의식 체계, 그리고 독립된 교단을 가진 새로운 종교이다.
일원상은 원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진리의 상징으로서 법신불이라 한다. 법신불 일원상은 우주의 근원이며, 인간의 본성으로써 그 진리는 우주에 가득 차 있어 인간과 만물의 생성 변화를 주재하지만,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가도 하여 대종사는 도형으로 그려진 일원상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다고 하였다.
일원상의 진리를 신앙하는 것은 우주의 진행과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불생불멸의 진리가 있다고 하는 믿음이며, 그 원리인 인과 응보에 대한 믿음이며, 삼라 만상이 곧 진리자체의 나타난 것임을 믿는 것이다.
그러면 일원상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법신불 일원상은 네가지 은혜로써 우리에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즉 천지은, 부모은, 동포은, 법률은.의 사은은 우리에게 잠시도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은혜다. 천지가 만물을 무한히 살려주는 도와 부모님이 이 몸을 낳아 길러주신 것은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근본적인 은혜에 속한다. 또 각자의 직업에 종사하여 생산 활동을 하는 것과 도덕, 법률의 질서가 있으므로 해서 우리 사회가 움직여가고 있는 것은 곧 일원의 진리가 사은으로 나타나서 나의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큰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일원상 진리의 내역은 곧 사은이며 사은의 내역은 우주 만물이다.
따라서 원불교의 신앙은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일원의 진리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과 사은에 은혜 입은 내용을 깨달아서 감사하고 보은하는 생활에서 출발된다. 신앙을 통한 보은 감사 생활은 평등 사회의 구현과 다 함께 잘 사는 세계건설을 목표로 산다.
또한 원불교는 마찬가지로 수행을 강조한다. 일원상의 수행은 일원상의 진리를 닮아가고 그 진리에 합하여 개인의 인격을 완성하는 방법으로 정신수양, 사리연구, 작업 취사의 수행 방법이 있다.
정신수양은 좌선, 새벽이나 밤 늦게 조용한 시간을 택하여 모든 잡된 생각과 헛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정에 마음을 모아 고요하고 맑은 가운데 초롱초롱한 본래의 마음을 찾아 거기에 머무는 것, 염불이나 주문을 외워 잡념을 쫓기도 하며,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진리 앞에 기도하는 것도 정신수양의 좋은 방법
사리연구는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본성, 그리고 인간 생활의 시비이해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수련 과정을 사리연구고 한다. 깨달음이란 사리연구를 통해 이뤄지고, 우주와 인간의 문제에 관한 깨닳음이란 지식만으로서는 가능하지 않다. 진리를 직관할 수 있는 지혜의 눈이 열려야 한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어가는 방법으로 경전을 봐야 한다. 경전은 성인들의 가르침이다. 원불교의 기본 경전은 정전, 대종경 이다. 또 매일 적당한 시간에 의두와 성리를 연마하고 대중이 모여서 토론하는 회화나 강연도 사리연구의 과목이다.
우리가 수양을 하고 일과 이치를 깨달아 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실행이 없다면 열매 없는 꽃에 불과하다. 옳은 일은 죽기로써 실행하고 그른 일은 죽기로써 하지 않는 실천력이야 말로 사회를 정화하는 근본이 된다. 이러한 실천력을 기르는 수행을 작업취사라 한다.
정의 실행의 힘을 쌓아가는 첫 걸음은 자기의 행동을 돌아보아 잘못된 습관이 있다면 고쳐가는 일이다. 원불교에서는 실천의 정도에 따라 30가지 계문을 받게 된다. 계문은 지금까지의 죄 짓는 행동을 그치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또 매사에 주의를 가지고 행동하고 조행을 하는 것도 실천의 힘을 쌓는 일이다.
※깊게 들어간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불교의 기본 바탕만 살펴본 격이였다. 책을 읽으면서 시대에 맞는 종교라는 언급한 것이 기억이 난다. 시대에 맞는 종교, 왠지 프래그머티즘적인 생각이 난다. 종교라는 것이 시대에 맞게 발생하는 것일까?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 종교 아닌가? 프래그머티즘의 제임스도 종교가 더 나은 삶을 제공한다면 좋은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종교는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원불교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로써 즉 프래그머티즘 상황속에서 생겨난 것 밖에 안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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