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사로서의 한국사만 해 한용운의 생애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자신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추가 직후에는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선을 닦았다. 이후 다른 세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나머지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와 만주등을 여행햐아셔따.
1905년 재입산하여 설악산 백담사에서 연곡을 은사로 하여 정식으로 득도하였다. 불교에 입문한 뒤로는 주로 교학적 관심을 가지고, 대장경을 열람하였으며, 특히 한문으로 된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일, 즉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하였다.
1914년 ‘불교대전’과 함께 청나라 승려 내림의 증보본에 의거하여 ‘채근담’ 주해본을 저술하였다. 1908년 5월부터 약 6개월간 일본을 방문, 주로 도쿄와 교토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물을 익히고, 일본의 풍물을 몸소 체험하였다. 일본 여행 중에 3.1 독립운동 때의 동지가 된 최린등과 교유하였다.
1901년 한일 합방이 되면서 국권은 물론, 한국어마저 쓸 수 없는 피압박 민족이 되자, 그는 국치의 슬픔을 안은 채 중국 동북삼성으로 갔다. 이곳에서 만주지방 여러 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의 훈련장을 순방하면서 그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하였다. 1918년 월간 유심이라는 불교잡지를 간행하였다.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간행된 이 잡지는 뒷날 그가 관계한 ‘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괄목할만한 문화사업의 하나이다. 1919년 3.1운동 때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충동을 하였다. 내용이 좀 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마지막의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재판을 받아 3년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출옥 후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 아래에서 강연등 여러 방법으로 조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하였다. 1925년 오세암에서 선서 ‘심현담주해’를 탈고하였다.
1926년 한국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싿. 이곳에 수록된 88편의 시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신념과 희망을 사랑의 노래로서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지회장의 자리를 겸직하였다. 나중에 신간회는 광주학생의거 등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전개, 추진되었다.
1930년 ‘불교’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그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전까지 권상로가 맡아오던 이 잡지를 인수하여 불교를 널리 알리는 데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고루한 전통에 안주하는 불교를 통렬히 비판하였으며, 승려의 자질향상, 기강확립, 생활불교 등을 제창하였다.
1933년에는 55세 때 부인 유씨와 다시 결합하였다. 1935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흑풍’을 연재하였고, 이듬해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를 연재하였다 이러한 소설을 쓴 까닭은 원고료로 생활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소설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려는 의도가 더 큰 것으로 이해된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하던 불교계통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인 만당사건이 일어났고,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이 시기에 ‘조선일보’에 ‘박명’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1939년 회갑을 맞으면서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에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자축연을 가졌다. 다솔사는 당시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거지였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의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별세하였다. 동지들에 의하여 미아리 사설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친하던 벗으로는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정인보, 박광, 홍명희, 송월면, 최범술 등이 있었으며, 신채호의 비문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Q. 불교인으로서 그만큼 조국수호에 대한 열의를 실천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특히 당시의 암울한 시대환경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그의 위대성은 한층 돋보인다. 그의 사상이 독창적이고 위대하였다는 무시할 수 없지만, 오히려 너무 시대상황에 비해 급진적이기에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까? 염불당 철폐 및 승려의 결혼을 인정하는 부분 등 시대상황을 너무 앞서간 주장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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