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민중의 조국통일운동
제 345 공화국 동안 억압되어왔던 조국 통일 운동은 제 6공화국이 시작되자 학생들을 중심축으로 활성화되었다.
* 왜 제 6공화국 때 통일 운동이 활성화 되었는가?
소련 및 여러 다른 동구 세력들과 교류가 활성화 되자 국민들은 반공반북 정책의 허구성을 깨달았고 북한이 더 이상 우리에게 적대자가 아닌 함께 나아가야 할 동반자라는 인식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 610 운동으로 국민들의 힘을 보게 된 노태우 정부는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유지 확대하기 위해서 국민들의 통일 요구를 무시 할 수 없었기에 북방통일 정책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4 16 총선의 결과, 여소야대 정국이 형성된 것 또한 여당의 일방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막음으로써 조국 통일 운동이 활성화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 노태우 정부가 단독 올림픽 개최를 통해 분단 고착화를 노골화한 시도와 그동안 국민들의 마음 속에 싹터왔던 반미의식이 맞물리면서 조국 통일 운동은 한층 더 대중화, 활성화 될 수 있었다.
* 조국 통일 운동의 전개
제 6공화국의 조국 통일 운동은 학생들이 그 첫 발을 내디뎠다.
1988년, 서울대 총 학생회장 후보였던 김중기 학생은 남북한 대학생 체육대회와 국토 순례대행진을 공동으로 개최하자는 의견을 제안하였고 이 제안에 대해서 북한 학생 측에서도 곧바로 환영의 뜻을 밝히는 등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학생들은 6월 10일 판문점에서 남북청년 학생 회담을 가지기로 하고 국토 순례 대행진을 시작했지만 정부의 반대로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많은 국민들에게 통일은 우리의 노력이 가장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건은 조성만 학생의 할복 투신자살 사건이었다. 서울대 화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성만 학생은 ‘척박한 땅, 한반도에서 한 인간이 조국 통일을 염원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명동 성당 옥상에서 자살했다. 재야단체에서도 조국 통일 운동이 활발했는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비롯한 11개의 재야 단체들은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민주단체협의회’(조통협)을 조직하고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화 및 범민족대회’(범민족대회)를 추진 본부로 구성하고 8월 15일 범민족대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고 말았다.
1988년 조국 통일 운동은 1989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학생의 방북 사건에 비하면 비교적 순탄하고 조용한 조국 통일 운동 이였다.
1989년 3월 25일, 평양에서 문익환 목사의 방북이 보도 되자 남한은 큰 충격을 받았다. 문익환 목사는 북한의 중상모략에 넘어가거나 남한을 비호 혹은 비방하기 위해 북한으로 간 것이 아니다. 단지 남한과 북한이 팽팽한 긴장감을 걷어내고 화해와 협력으로 서로를 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북한으로 간 것이다. 재야 세력의 대부였던 문익환 목사가 방북했다는 사실은 조국 통일 운동에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이 차츰 조용해질 때 임수경 학생의 방북 사건이 일어났다. 평양에서 개최 될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우리나라 대표로 임수경 학생이 파견 된 것이다. 6월 21일 서울에서 출발해 30일 평양에 도착한 임수경 학생은 북한에서 ‘통일의 꽃’으로 불리우며 많은 환영을 받았고 남한에서 호응이 대단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그녀는 ‘자동차로 가면 4시간 걸릴 거리를 열흘을 거쳐서 왔다. 남한으로 돌아 갈 때는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판문점을 통해가겠다’ 라는 강한 의지를 보였고 8월 15일, 마침내 그녀는 천주고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파견된 문규현 신부와 함께 군사 분계선을 넘었다. 비록 그녀는 돌아와 실형을 선고 받아 옥살이를 하였지만 그녀의 행동은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사건 이였다. 임수경 학생의 방북은 북한을 동반자로 여기고 민간교류를 추진하겠다는 노태우 정권의 77선언의 기만성을 폭로했으며 통일 문제에 관한 노태우 정권은 무능력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또한 남북한의 통일의 걸림돌은 군사적 대치상태와 국가 보안법이라는 것을 부각시켰으며,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남북한 학생들이 통일의 원칙과 전망에 기초해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채택한 것은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의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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