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의 화가들은 중국회화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여 한국적 화풍을 이룩하였고, 이 시기에는 일본 실정시대의 수묵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일본 수묵산수화의 비조인 주문과 그의 제자들의 작품, 수문과 문정의 작품에는 조선 초기 회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최경(崔涇)
안견(安堅)과 강희안(姜希顔), 그리고 최경(崔涇)은 세종-세조조에 활약한 대표적인 화원화가(畵員畵家)이다. 이른바 이들은 조선초기의 삼대가(三大家)로 칭하여 진다. 하지만 안견이나 강희안의 작품은 전존하고 있는데 비하여, 최경의 작품은 현재까지 확인 및 고증된 것이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최경의 예술세계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해 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최경의 경우와 같이 전존작품이 거의 없는 화가들의 인생과 예술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문헌을 찾아 분석하는 일이다. 하지만 최경의 경우 안견이나 강희안에 비하여 언급한 문헌이 상대적으로 적어 그를 연구하기란 결코 쉽지가 않으나, 조선초기의 삼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그를 연구하지 않고서 세종-세조조의 회화사가 올 바르게 정립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최경의 자는 사청(思淸), 사청(四淸), 여청(汝淸) 등4)이고, 호는 근재(謹齋)이다. 그는 화원(畵員)으로서 도화원(圖畵院) 별제(別提)를 지냈다.
인물화에 뛰어났으며 산수화의 대가인 안견(安堅)과 병칭되었다. 세종 때에 화원이 되었으며 성종 때에 가장 이름을 날렸다.
본래 경기도 안산에서 소금을 굽는 염부(鹽夫)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으며, 도화원(圖?院) 생도가 되어 화업(?業)에 정진한 끝에 도화원별좌가 되었다.
또한, 성종 때에는 소헌왕후·세조·예종·덕종의 어용(御容)을 성공적으로 그려 화원으로서는 최초로 당상관에 제수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기도 하였으나 많은 신하들의 반대로 인하여 취소되었다.
어용·불상·인물 등의 그림에 있어서 뛰어난 재주를 지녔으며, 또한 허세를 부리고 과시적인 성격을 지녔었기 때문에 승진을 거듭하기도 하고 도화원에서 파직되어 매를 맞고 관노(官奴)가 되기도 하는 등 파란이 많은 생애를 살았다.
주로 도화서의 동료인 안귀생(安貴生)·배련(裵蓮)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북송(北宋)의 이공린(李公麟), 남송(南宋)의 유송년(劉松年) 등의 화풍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남아 있는 작품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다.
일본에 그의 이름이 적힌 「백의관음상(白衣觀音像)」이 한 점 전해지고 있으나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안귀생(安貴生)
『세조실록(世祖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한국회화사(韓國繪畵史)(안휘준, 일지사, 1980)
『조선왕조시대(朝鮮王朝時代)의 화원』(안휘준, 『한국문화』9, 1988)
『한국의 풍속화』(정병모, 『한길아트』2000)
역사와 사상이 담긴 조선시대 인물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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