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파동과 315 부정선거
그러나 이 후에 국가보안법에 대한 반대 시위는 계속 있었다. 12월25일 민주당 조병옥의 신보안법 반대 국민궐기 촉구와 함께 국가보안법반대투위를 두면서 신보안법 반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여론은 이미 보안법 제정을 고비로 들끓기 시작했다. 자유당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어용학자와 언론인들을 동원, 우민화시키려 들었다. 사실 보안법은 이미 제정전후부터 여론의 질타를 받았었다. 폭력이 난무하고 불법이 횡행한 신보안법을 국민이 외면한 것이다. 그리고 24보안법 파동과 병행, 설치된 국가보안법 개악반대 국민대회준비위원회는 1월4일 서울 시청 앞에서 거행될 [신보안법 반대 데모]를 1월7일로 정했다. 이를 위해 국민대회준위는 평화적 시위를 보장하기 위해 데모계를 1월5일 시경에 제출했지만 경찰은 집회를 불허했다. 신보안법과 관련한 일체의 데모를 처음부터 봉쇄한 것이었다. 결국 1월7일 6일밤을 꼬박 새우며 평화적 시위의 허용을 요청해 온 국민대회준위 지도위원 및 상임위원들은 새벽부터 경관들에 싸여 제지당하였고 일반국민의 부질없는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로 시위는 중단되었다. 그후 국민대회준위와 민주당 측을 주축으로 한 보안법무효 데모가 시내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기 했다. 그러나 이미 56년 정부통령선거와 58년 제4대 민원의원선거 결과에서 보듯이 민심은 이승만 정권을 떠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제정된 보안법도 이승만을 지켜 주지는 못하고 결국 이승만 정권은 315 부정선거에 의해 촉발된 419 민주항쟁에 의해서 몰락하게 된다.
◇315 부정선거
제 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선거. 제 2대 선거를 분석한 자유당은 정당한 방법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부정한 방법을 사용한다. 조병옥이 신병치료 차 미국에 가 있는 틈을 타서 5월에 예정되어 있었던 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실시하였고 또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정선거를 실시하였다. 거기에는 4할 사전투표, 3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 위협, 야당참관인 축출, 유령유권자의 대리투표,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득표수 조작발표 등이 있다. 이러한 이승만 정권의 음모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신병치료 차 미국에 간 조병옥이 사망한 후 이승만의 4선은 확실시되었으나 부통령 입후보자 이기붕의 당선이 문제였다. 당시 이승만은 건강이 약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부통령 이기붕의 당선은 필수요소였다. 이기붕은 그의 처 박마리아를 배후조정자로, 내무부장관 최인규를 하수인으로 내세워 부정을 집중적으로 감행한 결과 이 선거는 유례없는 부정선거로 전락하였고, 이날 마산에서는 의분을 참지 못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들고일어나 시위를 벌였다. 3월 15일 당일날 밤 마산에서는 광범위한 시민의 참여아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으며,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실종된 김주열 군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마산부두에서 발견되자 다시 대대적인 군중시위가 일어나 폭동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마산 시민들의 봉기는 4월민중항쟁을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3월 17일 자유당정권은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했으나 대다수 국민들은 선거결과를 수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선거무효주장에 호응하여 부정선거 규탄데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315부정선거가 우리 나라의 현대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이 선거는 어떤 의미였을까?
한국전쟁 이후 우리 나라는 미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미국은 우리 나라에 무한정의 원조를 제공하였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남한의 경제를 안정화시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막대한 양의 경제원조가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원조가 57년 이후 줄어들었고 이는 정부재정의 악화와 더불어 그것을 기축으로 운영되던 국내 독점 자본의 축적 조건을 크게 약화시켰다. 따라서 원조에 바탕을 둔 우리 나라 경제는 침체될 수밖에 없었고 국민들은 더욱 큰 조세부담을 지게 되었다.
또한 이승만의 권위주의적 통치체제 국민 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개헌, 진보당사건, 국가보안법파동, 경향신문 폐간사건 등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건이 이승만 집권 내내 일어나고 있었다.
는 점점 그 실상이 들어 나면서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된다. 연줄과 빽, 이승만 개인과의 친분관계, 반공 정신의 철저성 여부가 모든 것을 결정하였으며 어떠한 민주적인 장치라든가 제도가 시행되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 사회적 조건은 전후 한국인들의 가슴을 내리 눌렀던 정치적 허무주의, 무관심, 패배감에 의해 유지조장되기도 하였지만 전쟁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면서 주로 도시의 인텔리나 중간층의 시야에 잘못된 것으로 가시화 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곧 투표에서 반 이승만, 반 자유당 표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반 이승만, 반 자유당 세력은 정치 변혁의 원동력이 되기에는 아직 미흡했기 때문에 모든 시선이 대중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제도인 선거로 집약되었다. 선서에서의 승리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사회변혁이나 삶의 질적인 개선을 가져올 수 없었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사회의 상황들은 다가오는 1960년의 대통령 선거에 광범위한 반 이승만 세력의 정치전선을 형성시켰고 모든 사람들이 이 선거에 큰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는 선거 직전 조병옥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일단 좌절을 맛보았고 315부정선거에서 자행된 엄청난 가시적인 부정을 목도하면서 집단적인 불만으로 확산, 응집된 것이다. 즉 315부정선거는 잠재되어 있던 운동세력을 결정적으로 전면에 등장시킨 촉발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아직 구체적인 정치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던 도시의 중간층 세력을 이승만 세력으로부터 분리시켜 운동의 지지자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 왜 학생들이 주도세력으로 나서게 되었는가?
농민들은 대부분의 인구를 차지하고 있었고 사실상 극빈층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국가와 자본의 일차적인 지배관계에 놓이게 되어 놓이게 되어 사실상 토지개혁으로 사라져 버린 지주와의 계급적인 지배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 또한 어용 대한 노총의 전일적인 지배아래 자주적인 조직 결성을 봉쇄당하고 있었다. 즉 이 당시에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국가의 지배계급에 맞서 싸울만한 역량이 없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당장의 생계문제 때문에 국가에 굴복하지 않아도 되는 학생신분으로서는 국가의 권력 행사와 정치권력의 행태를 더욱 객관적이고 이상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학생으로 하여금 운동세력이 될 수 있는 객관적인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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