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치료와 철학자 스토아학파 VS에피쿠로스 학파
반대로 에피쿠로스학파는 오히려 죽음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들은 데모크리스토의 원자론의 영향을 받아 원자가 모여서 너, 나 물질이 되는 것이고, 원자가 흩어지면 모든 것이 소멸하는데 이 소멸이 바로 죽음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란 이 원자들이 흩어지는 일종의 현상이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도 없고, 미리 걱정할 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중에 올 죽음은 미리 걱정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라고 충고한다. 극복이 아니라는 점에서 스토아학파보단 소극적이다. 이렇게 죽음의 고통에서 잠시 회피하여 죽음을 걱정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태도로, 지속적 쾌락을 추구할 것과 검소한 삶을 강조했다.
쾌락주의의 입장에서 ‘검소, 절제’ 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역설적인 것 같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말하는 쾌락은 정신적, 지속적 쾌락이다. 이들은 쾌락을 3가지로 나눴다. 필수적 욕망,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 그리고 공허한 욕망이다. 필수적 욕망은 의, 식, 주 즉 최소한의 욕망이다. 필수적 욕망을 ‘음식’에 대응시키면,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은 ‘맛있는 음식’이다. 공허한 욕망은 명예, 부 따위고,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욕망이다.
에피쿠로스학파는 이 세 가지의 욕망 중에서 오직 ‘필수적 욕망’만을 인정했다.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과 공허한 욕망은 ‘허황된 욕망’이라 해서 인정하지 않았다. 즉 인간의 자연적 욕구를 충적하며 얻어지는 쾌락만을 추구했다. 이런 논리를 따라가면 ‘검소, 절제’하는 삶은 자연스레 따라온다. “빵과 물만 있으면 신처럼 행복해 질 수 있다”라는 한 줄로 이해 될 수 있다.
이렇게 정신적, 지속적 쾌락을 추구하여 허황된 욕심을 갖기 않고, 죽음에 대한 고통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여 마음에 불안, 공포가 없는 상태가 에피쿠로스학파의 주된 주장이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쾌락주의로 불리는 거 보다 즐거움 기쁨에 가까운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스토아학파
‘스토아’의 뜻이 기둥이다. 그만큼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스토아학파는 욕구, 정념을 극복하려고 투쟁하여 욕구를 완전히 이겨버리려 했다. 그만큼 쾌락을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극단적 고행을 통해 고통과 정념, 모든 욕망들을 이겨내고 극복할 수 만 있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특히 죽음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 무 정념의 상태가 될 수 있다. 스토아학파는 단 일말의 유희조차 허락하지 않았고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의 정념은 모두 완전히 싸워서 정복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단한 절제 수준이 아니라 완전한 극복, 금욕을 요구한다. 이것은 이성 중심의 계보라 할 수 있다.
스토아학파는 이 세상엔 보편이성, 세계이성, 우주이성이 있는데 이게 바로 자연 법칙이고, 이 자연법칙은 곧 인간이성이라고 보았다. Logos, 즉 신은 모든 자연에 깃들어 있고,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성은 자연법칙과 동일하고, 이 자연법칙은 우리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그 무언가이다. 우리는 의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이 자연법칙을 깨닫고 이에 순응하여 우리의 이성과 자연법칙이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바로 위에서 말한 부동심 무정념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는 이렇게 삶으로서 명랑하고 경건하게 죽음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죽음은 신의 섭리이고, 필연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자연법칙이므로, 그날까지 금욕하며 살자 라고 사람들을 위로한다.
정리하자면, 에피쿠로스학파는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고, 쾌락은 유일한 선이며 고통은 유일한 악이다라고 했으며 정신적이고 지속적인 쾌락 즉 간섭이나 고통이 없는 순수한 쾌락을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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