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포클레스가 지닌 철학 상담적 의의 -
서론.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앞날을 더욱 아름답고 빛나게 만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일이나 공부, 운동 등에 열심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마냥 재밌고 쉽기만 하다면 노력이란 말을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노력의 뜻은 원하는 바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하여 ‘애를 쓰는 것’을 말한다. 즉 노력을 요하는 일이란 애를 써야 하는 일, 재밌거나 쉽지 않은 일들이란 의미이다. 자신의 앞날을 위한 일들이 바로 이런 일들이다. 누구도 일이나 공부, 운동 등이 마냥 재밌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힘들고 어려운 시간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이겨낸다면,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에 우리는 힘든 시간을 묵묵히 버텨낸다. 사람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는 서로를 위로하며 이런 말을 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생각보다 흔하게 이 말이 틀렸음을 증명이라도 하는듯한 장면들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 과로로 병을 얻은 우리네 아버지, 자식 뒷바라지에 젊은 날 다 보내고 자식들 시집, 장가 다 보내니 암에 걸려버린 우리의 어머니,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들어갔지만 살인적인 학비에 아르바이트로 고생하다 자살해버린 아들, 딸들, 나의 친구들. 이런 예는 무수히 많다.
도대체 우리는 왜 노력하는 것일까? 물론 노력하지 않는 자는 아무런 미래가 없다.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장해 주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마치 쳇바퀴 돌아가듯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우리는 버려진 것만 같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이름의 비극이 아닐까? 인간에게 주어진 이런 부조리함을 2500년 전에 통찰한 한 사람이 있다. 철학사에서는 그 이름을 잘 찾아볼 수 없는, 우리에게 ‘오이디푸스’라는 비극 작품으로 잘 알려진 소포클레스이다.
본론. 비극 작품 오이디푸스
소포클레스란 이름이 생소함에도 그의 작품인 오이디푸스의 이름은 생소하지 않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너무도 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론이 너무도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음에도 알렉스 하워드는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가 소포클레스의 그것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자식들의 부모를 향한 성적인 욕망을 어떻게 조절하게 되는지, 그러고서 어떻게 사회성을 지니게 되는지를 설명해주는 가설이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성적인 욕망이라는 것도 충격적이지만 더 큰 충격은 그 조절의 방법이 부모로부터의 살해 위협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런 가설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보통의 경우, 그리고 대다수의 경우 부모가 그 어린 자식을 죽이려는 의도를 갖거나 실질적인 위협을 아이에게 가하지 않을 것임은 당연하다. 또한 그 어린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려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기억이 전혀 없다. 알렉스 하워드는 우리가 만일 부모가 없을 경우 우리에게 미칠 영향을 상상할 수 있으므로 프로이트의 가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분명 프로이트는 생전에도 이런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이런 비판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우리의 의식 층에 떠오르지 않고 무의식층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게서 얻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유용한 통찰은 보이지 않는 내적 세계, 무의식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의식적으로 생각하고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도 그런 행위를 왜 하는지 모르는 많은 행동들에 납득할만한 훌륭한 설명을 프로이트는 제공한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도 프로이트에게는 무의식의 작용에 의한 비극으로 이해되어진다. 이성적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무의식층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는 분명 놀라운 통찰이고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그렇지만 이는 오이디푸스의 원저자, 소포클레스가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그 운명에 대하여 깊게 통찰한 것에 조금도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다. 소포클레스가 말하는 비극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개인적인 좁은 틀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인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자신의 여자로 만든 인물로 그려진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오이디푸스에게 비극적이었는가? 대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그렇지만 이런 일련의 상황 가운데서 무엇이 오이디푸스에게 비극이라는 불행을 가져왔는가? 오이디푸스가 가진 인간의 본성,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때문인가? 프로이트라면 바로 그것이 오이디푸스의 비극이라고 말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포클레스의 깊은 통찰은 좀 더 넓은 그림에서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바라보게 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일 것을, 그리고 어머니와 잠자리를 할 것을 바랬는가? 자신이 죽인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그리고 자신과 잠자리를 한 여자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았는가? 꿈에라도 오이디푸스는 그와 같은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비와 어미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의식적으로 바라지 않았음은 분명하며, 그리고 무의식적으로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지지할만한 아무런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바라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오이디푸스가 바란 것은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겁탈하려는 패륜이 아니었다. 이웃 나라를 정복한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분명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영웅적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 오이디푸스의 행위를 프로이트는 패륜이라는 결과로만 해석하였고 그 결과 리비도를 조절하기 위한 한 이론에 오이디푸스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소포클레스도 오이디푸스의 행위를 패륜의 행위로 그렸음은 물론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이디푸스가 패륜의 행위를 한 이유는 스스로가 그것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바랬기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는 선한 행위를 바라고 열심히 노력하였음에도, 운명이란 이름의 잔인한 심판이, 그에게 불행을 선고한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프로이트가 자신의 사상에 담아내지 못한 소포클레스의 진정한 통찰이다.
1. 피에르 아도, 이세진 역, 『고대철학이란 무엇인가』, 이레, 2008.
2. 스털팅 p. 램프레히트, 김태길 외 역, 『서양철학사』, 을유문화사, 1963.
3. 피터 b. 라베, 김수배 역, 『철학 상담의 이론과 실제』, 시그마프레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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