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창녀와그녀의 매춘행위에서의 종교적 의미성 창녀와 종교적 의미의 관계
매춘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여자가 돈을 받거나 어떤 대가를 약속 받고 남자에게 몸을 파는 행위』 이다. 우리나라는 법률적으로 매춘을 윤락행위라 하여 불 특정인으로부터 금전 및 기타 재산상의 이익을 수수 또는 약속을 받거나 기타 영리의 목적으로 성행위를 하는 것(윤락행위 등 방지법 2조)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writeContents 매춘과 창녀의 기원
매춘은 언제 시작 되었을까?
동물행동학 연구자들은 증여 즉, 영장류의 암컷(또는 젊은 수컷)이 먹이를 얻었을 때 그 답례로 혹은 상대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고등 영장류 중에서 매춘행위를 엿 볼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만약 매춘을 부정적인 행위로 규정할 경우 위와 같은 행위는 매춘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생물학적으로 정당화되는 패턴 행위(우정이나 복종의 표시)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모권제 사회에서 부권제 사회로의 이행과 함께 여성들은 단지 상속을 위한 적자생상자로서 남성의 소유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여성에 대한 노동력의 통제와 더불어 성적 통제로 남성에 의한 여성의 독점적, 배타적인 소유로 여성에게 순결과 정조를 강요하는 가부장제적 일부일처제의 혼인형태를 출현시켰다. 바로 이 가부장제적 사회와 더불어 매춘이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일반 적이다.
매춘 혹은 창녀의 시초는 사원창부의 종교적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사원창부는 처녀무녀들과 함께 신전에서 일하는 콰디쉬투나 콰딜투, 쿨마쉬투 라는 제 2그룹의 여성들로서 도시국가의 지배자나 혹은 무당과 성관계를 가짐으로써, 매년 되풀이되는 식물의 재생을 상징적으로 재현했다. 이들은 매우 존경받는 위치였으며 그들의 행위 역시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밀리타(풍요의 여신)의 신전에서 자신에게 은화를 던지는 남자와 성행위를 가지는데 이를 신에게 최초의 결실을 바치는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고대이집트, 페니키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에도 같은 형태의 풍습이 있어 사원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방법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은 흔히들 알고 있는 사실로 요즘 말하는 공창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이다.
contentboardbody 문학에서의 매춘
문학의 가장 흔한 소재인 ‘사랑’에 뒤지지 않는 소재가 바로 육체일 것이다. 육체는 사랑을 완성시키는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때론 순수한 영혼을 파괴시키는 죄가 되기도 한다. 매춘 혹은 창녀야 말로 언제나 순수한 영혼을 악의 심연으로 유혹하는 육체의 죄를 상징하곤 했다.
한국문학에 있어 속칭 ‘창녀문학 & 매춘문학’이 왕성하게 발표된 시기는 70년대 이후이다. 70년대는 산업화의 시대로 도시는 공격적 성장 논리의 상징이 되었으며, 그 역동성에도 불구하고, 익명성과 획일성, 소비제일주의 등 병리적 현상이 나타났다. 도시의 병리적 현상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매춘의 급증이며, 이를 사회화한 것이 70년대 문학의 한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가 책에서 배웠듯이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시대 대부분의 창녀문학에선 창녀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모두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사회적으로도 공평한 기회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여전히 가난하며 결국은 창녀가 된다. 이렇듯 부자와 빈자의 반복적 재생산 구조는 그들의 출생 구조에서 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리 속에서 70년대 문학은 매춘을 다루고 있다. 이후에도 매춘은 지속적으로 진지하게 작가들의 성찰 대상이 되어 왔으며 80년대 이후부터는 여성주의 입장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송기원의 「늙은 창녀의 노래」는 창녀를 소재로 한 여타의 작품들과는 차별성을 지니고 있다. 우선 내용적 측면에서,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선악의 대립구조나 사회적 억압을 은유하는 반면에 늙은 창녀의 내밀한 개인적 삶을 통해, 창녀의 존재를 천한 대상 혹은 우리와 구별되어진 이질적 존재가 아닌, 동일한 시공간 속을 걸어가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형식적 측면에서, 이 작품은 일종의 모노드라마의 형식을 보인다. 대화체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나, 대화 상대자는 오로지 늙은 창녀의 언어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상대자는 끊임없이 나의 이야기를 설득하고 부추긴다. 설득하는 언어와 나의 언어는 충돌 없이 완벽히 나의 언어 속에서 완성되고 다시 지속된다. 따라서 독자는 마치 한 늙은 매춘부의 생생한 삶을 듣는 듯 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러한 형식 때문인지 이 작품은 연극으로 상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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