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인의 국가 형성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로마의 세계 지배는 그리스 외의 민족어를 소멸시켰으며 민족간의 차이를 소멸시켰다. 로마의 행정과 법률은 고대 씨족적 결합을 파괴했고, 지역 민족의 자립성까지도 붕괴시켰다. 로마는 광대한 지역의 방대한 인간을 규합하고 있으면서도 그 대신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사회적 상황은 보다 절망적이였는데 공화국 말기에 들어서며 로마는 지배한 주에 대한 착취를 제도화하였고 제국이 쇠퇴해 갈수록 조세와 부역은 더욱 늘어갔다. 로마인들은 지배자로서 상공업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무역, 수공업, 예술 등에 걸쳐 쇠퇴와 궁핍화가 진행되었다. 이는 인구의 감소와 도시의 황폐화, 농업기술의 쇠퇴로 이어졌다.
농업이 다시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공화정 이후 대규모의 통합된 소유지 라티푼디아, Latifundien
는 소수의 노예로 운영되는 목장과 대규모의 노예 노동을 요하는 채마밭 경작이였는데 이는 도시의 황폐화와 함께 쇠퇴해 갔다. 라티푼디아 체계는 더 이상 수입을 가져오지 못하게 되었고 잇달아 소규모 분할지로 세분되어 대어되었다. 이 소 분할지는 주로 콜로누스(Colonen)에게 대어 되었으며 이들은 토지에 얽매여 그 분할 지와 함께 판매 될 수 있었다.
도시의 메뉴펙츄어나 대규모 농업은 지출된 대량의 노예 노동을 보상 할 만한 수익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해방된 노예들의 수효가 증대되었고, 한편으로 콜로누스와 영락한 자유민들의 수효가 증대되었다. 노예제가 사멸의 길로 치닫고 있었지만, 노예의 생산적인 노동은 로마의 자유민들에게 어울리지 않게 여겨졌다. 노예노동은 경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고, 자유민의 노동은 도덕적으로 천시되었기 때문에 로마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셈 이였다.
자유농과 소농들은 관리, 재판관, 고리대금업자들의 폭압을 모면하기 위해 유력한 자의 파트로나트(Patronat)에 의거했다. 보호자는 토지를 양도하면 그 대신 일생동안 토지를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4세기 황제들은 이것을 금하는 법령을 선포했지만 교회는 이 관계를 이용해 9세기와 10세기에 자신의 토지 확장에 매진했다. 많은 로마인들은 이러한 로마의 관리들과 대토지 소유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미개인들이 점령한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게르만인들은 로마인을 해방시켜주는 대가로 영토의 3분의 2를 빼앗아 분배하였는데, 산림과 목장등 분할되지 않은 토지는 공동으로 이용하게 되었으나 분할된 토지는 양도할 수 있는 사유재산 알로드, Allod
으로 변화하였다. 씨족이 자기 촌락에 오랜동안 거주하고 로마인과 게르만인의 유대가 강화 될 수록 혈연적 유대는 희박해지고 지역적 성격은 강화되었다. 이러한 지역적 성격은 씨족제적 특징인 원시적 민주주의의 성격을 보존하고 있었다. 정복의 결과 로마의 지배자가된 게르만인들은 씨족적 조직으로 로마 대중을 흡수 할 수 없게 되자 로마의 행정기관 꼭대기에 위치하던 국가를 대신할 또 다른 ‘국가’가 발생할 수 밖게 없는 상황에 이르는데 이런 과정으로 씨족제도의 기관은 국가기관으로 신속히 전환된다.
프랑크 왕국의 경우 로마의 직할지 뿐만 아니라, 각 관구(Gau)나 마르크 공동체들에게 분할되지 않은 산림지대를 독차지했다. 평범한 군사령관에서 군주가 된 프랑크 왕은 인민의 재산을 왕의 재산으로 만들거나 자신의 신하에게 증여 또는 대어했다. 초기에 전시 수행원이나 기타 하급 지휘관이였던 이 신하들은 얼마안가 로마인과 노예, 농노 및 해방된 자들로 증강되었고 이들에 대한 왕의 토지 증여 등의 방법으로 견고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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