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권력과 결탁된 루터의 종교개혁 세속권력과 결탁된 루터의 종교개혁
1483년 자수성가한 광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루터는 처음에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희망했던 부친의 뜻에 따라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종교적 양심의 가책으로 고뇌하던 그는 뇌우를 만나 죽을 뻔했던 사건을 계기로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수도사 생활을 거쳐 신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끝없는 신학적 고뇌를 통해 인간의 선한 행위가 아닌 신의 은총, 신에 대한 믿음만을 통하여 인간은 의로워질 수 있고, 교황이나 공의회의 말이 아닌 성서에 적힌 말만이 진리를 나타낸다는 그의 교리를 구축하게 된다.
당대의 가톨릭교회는 세속적 권력과 이윤을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등 매우 부패해져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이미 앞선 시기 위클리프와 후스가 가톨릭교회를 비판하고 종교개혁을 시도했으며, 동시대에 에라스무스가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종교개혁에 대한 논의는 매우 활발했다. 이는 일반 민중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을 개축하기 위해 독일 지역에서 면죄부를 과도하게 판매하였던 일은 민중들의 반발을 사는 계기를 낳았다. 게다가 당시 도시경제의 발달과 농촌경제의 몰락으로 기사계층이 민중들에게 조세부담을 더욱 가하게 되자, 이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만이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발과도 맞물려 더욱 큰 종교개혁 움직임으로 나아가게 된다.
1517년 루터는 ‘면죄부에 관한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오용을 비판하였다. 그의 논제는 당대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민중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며 가톨릭교회에 대한 비판의 여론이 거세지게 된다. 게다가 15세기 구텐베르크에 의한 인쇄술의 발달은 루터의 저서와 논제가 빠르게 독일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루터로 인해 촉발된 교회 비판의 파급력이 커지자 가톨릭교회는 파문경고칙서를 보내 루터를 위협하였다. 하지만 루터는 파문경고칙서를 불태우고 스스로 파문되는 길을 택하여 가톨릭교회와 결별할 뜻을 분명히 했다. 종교개혁운동의 움직임이 확산되자 새로 선출된 황제 카를 5세는 보름스에서 제국의회를 열어 루터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루터가 황제 앞에서 그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자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통해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자로 선포하고 제국에서 추방시키는 한편, 그의 출판물들을 검열하여 종교개혁의 움직임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보름스 칙령은 당대 독일의 정치적 분열 탓에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당대 독일은 약 300여 개의 제후국과 제국도시들로 분열되어 있어 황제의 정치적 영향력은 주로 그의 가문의 영지에 국한되어 있었다. 많은 제후국과 제국도시들은 황제와 교황의 간섭에서 자유로워지려 했는데, 이러한 정치적 요인은 독일 내 많은 제후국과 제국도시들이 종교개혁운동에 동참하는 데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루터가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운동을 계속 수행해 나갈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은 독일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제후 중 하나였던 작센 선제후의 뒷받침이었다.
루터의 교리가 세속 제후들의 이해관계에 부합했던 것은 종교개혁운동이 확산되어 나가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루터는 기독교도는 하느님의 국가와 세속의 국가에 속한다는 두 정부론을 주장하였다. 루터의 두 정부론에 따르면 세속 국가의 규칙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기독교도는 이에 반항하여서는 안 된다. 그는 이러한 논리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발발한 농민전쟁 당시, 그를 지지하던 민중들의 뜻을 저버리고 제후들이 농민군을 과격하게 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민중들의 지지를 잃었지만 제후들의 지지를 계속 확보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루터는 가톨릭교회가 부패와 타락을 자정할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세속 제후들이 종교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루터파로 개종한 세속 제후국에서는 국가의 주도로 종교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속 제후들은 가톨릭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자신이 감독하는 새로운 루터파 교회를 세웠다. 이에 루터파 제후들의 국가에서 수립된 ‘국가에 의한 교회 정부’ 구조에서 제후들의 권력은 종교개혁 이전보다 증대되었다. 이러한 세속적 이해관계는 많은 제후들이 루터파로 개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개혁의 진행과정은 루터 자신의 사상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루터의 두 정부론은 하느님의 국가와 세속의 국가는 별개의 영역이며, 세속의 국가는 믿음의 영역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위해 세속 제후들의 개입을 지지하였을 뿐 아니라, 작센의 ‘국가에 의한 교회 정부’가 종교개혁을 진행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모순적인 태도는 루터가 상당히 정치적인 인물이었으며, 종교개혁 과정에서 세속적 권력과 결탁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버릴 수 없게 한다.
한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통하여 멜란히톤이 시도했던 루터파와 가톨릭교회와의 타협이 실패로 돌아가자, 루터는 를 통해 황제가 루터파를 무력으로 억압한다면 황제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농민전쟁 당시 그가 세속의 국가에 반항하지 말아야 한다는 논조를 내세워 농민들의 무력 폭동에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과 비교해 보면 매우 이율배반적이다.
루터의 이러한 이율배반적 태도는 그가 정치적 이해관계에 충실했던 인물임을 잘 보여준다. 사실 그는 보름스 국회에서의 연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독선적일 정도로 자신의 신념이 확고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농민전쟁에서는 농민들에 맞서서, 종교전쟁의 위기 속에서는 황제에 맞서서 자신을 비호하는 제후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이러한 그의 이율배반적 태도는 자신을 비호해 주는 세력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관적일 것이다.
결국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지지하는 제후국과 도시국가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맺어 황제와 가톨릭을 신봉하는 타 제후국들과 본격적으로 대립하게 된다. 두 종교적 세력 간의 정치적 대립은 더욱 극심해져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를 통해 마침내 제국 내에서 루터파가 공인받게 된다. 그러나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를 통해서도 두 종교세력 간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끊이지 않았고, 마침내 1618년 최대 규모의 종교전쟁인 30년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는 루터의 교리 논쟁 과정에서의 독선적, 비타협적 태도나 논란이 되는 반유대주의, 반이슬람주의적 자세들도 모두 다루면서 루터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세속적 권력과 결탁한 루터의 행동들에 대해서는 이와 관련된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만 제시할 뿐, 어떠한 직접적인 서술이나 부정적 평가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속화된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대한 비판적 의식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도 그 과정에서 루터 그 자신과 루터파 제후들의 이해관계가 크게 개입되었기 때문에 세속화 문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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