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기독교 전쟁 이후 한국사회 좌우 이념갈등
1. 전쟁 이후 한국사회 좌우 이념 갈등
저자가 본 ‘한국사회의 좌우 이념 갈등의 중심에 한국 기독교가 있으며, 이들은 우익 진영을 대표한다.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우익 진영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부상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부터로, 그 중심에 월남한 서북 출신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p.14
2. 서북 지역민들의 생활과 기독교 수용
오래전부터 지역적으로 "척박한 농토, 정치적 차별 등으로 이 지역민들은 일찍부터 상업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경제력은 최고가 되었지만" 유교적 시스템을 갖춘 조선 정부에서 이들은 정치적으로 성장할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가 유입된다. 미국 선교사들의 전략도 좋았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유일신을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연결했던 것. "지역민들은 자신들이 지역 신으로 오랫동안 모셔온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유일신과, 서양의 번성과 관련되어 있는 기독교의 유일신을 자연스럽게 연계하면서 조선 왕조를 부정하는 의식으로까지 확대해 나갔던 것"이다.
또한 한국전쟁도 모종의 역할을 한다. "전쟁 시기 지역민들이 교회를 찾은 이유는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기 위해서였다." "당시 교회가 피난민 수용소 역할을 했으며, 일본군조차 교회만은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3. 서북 지역의 선교사들의 활동
서북 지역은 여러 기독교 교파 중에서 장로교가 특히 우세했다. 이는 1892년부터 시작된 외국 선교부의 선교지 분할 협정에 의해 평안도와 황해도 이북은 미국 북 장로교 선교부,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회(1925년 이후 캐나다 연합교회)의 선교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p.30
선교사를 매개로 한 미국과의 관계망, 근대 지식층과 미국 유학생, 그리고 이 지역민들의 정체성에 대한 내적 기반을 강화하고 확대할 수 있는 거점인 교회와 기독교 학교 등은 이 지역민들이 한반도의 권력 집단으로 부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원이었다. p.31
삼일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으며, 이 중 10명이 서북 지역 출신이었다. p.52
4. 광복 이후, 서북지역의 자치적 시민 활동
일제의 강요로 일제 말기에 부일 협력을 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기독교인이 순교하고 박해를 견디며 일제의 종교 정책에 저항했기 때문에, 광복이 되자 서북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기초한 국가 건설을 위해 각 지역에서 펼쳐진 자치적 시민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이들의 정치 사회운동은 광복 이후 서북 지역의 자치적 시민 활동의 핵심적 토대가 되었다. p. 60
5. 월남한 기독교인들과 피난민 교회와의 관계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즉각 독립이 아니라 신탁 결정이 내려지자 조만식을 중심으로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1946년 3월 소련군 사령부와 김일성이 토지개혁을 단행. 이들에 반대하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체포 혹은 행방불명되거나 검거를 피해 월남했다. p. 63 이들은 피난민 교회, 특히 한경직의 영락교회를 거점으로 삼아 월남한 목사를 중심으로 강한 연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p. 66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