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은 오뚝이라 불릴 만큼 여러 번의 실각과 복직을 반복했다.
첫 번째 실각: 그는 1933년 공산당 국제파에 의해 국민당 군대와의 투쟁방법을 달리 주장한 모택동 파로 몰려 강서성 당서기직에서 해직됐다. 1934년 국민당 군대의 포위를 뚫고 홍군(紅軍)과의 장정을 시작한 등소평은 1935년 당 중앙비서장으로 뽑히며 다시 정력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두 번째 실각: 1966년 문화혁명 초기 유소기와 함께 모택동 파인 홍위병(紅衛兵)의 행동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고, 모택동의 분노를 사며 1967년 7월 공직으로부터 파면됐다. 그리고 1968년 10월에는 강서성으로 유배되어 기계공장에서 일을 하는 혹독한 시련을 당했다. 1973년 3월 주은래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세 번째 실각: 1975년 당정치국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부총리와 군총참모장도 겸임하게 된 그는 문화혁명의 급진노선을 비판했다. 그러나 1976년 1월 주은래가 사망한 후, 모택동의 추종자인 문화혁명파 4인방에 의해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1976년 10월 모택동의 사망과 함께 화국봉이 주은래 계열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화국봉의 힘만으로는 정국수습이 어려웠으므로 1977년 7월 등소평은 복직되었다.
그 후 화국봉과 5년간의 권력 투쟁 끝에 1981년 실질적은 권력을 장악하였다.
사상
1)실사구시 사상의 제기
등소평은 자신의 모든 공직이 회복된 1977년 7월 당 11기 3중전회 연설에서 ‘사실로부터 진리를 규명한다’는 모택동의 슬로건을 주창했다. 등소평은 실사구시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기초인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사상의 정수가 된다고 말함으로서 실사구시의 이론적 근거가 마르크스주의와 모택동사상의 단절이 아닌 연속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현재 우리들이 4개현대화를 실현하려면 실사구시에 의존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4개현대화의 이론적 틀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기초로 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말하고 있다.1)
그러나 등소평은 모택동에 대해 “모택동은 실사구시, 즉 모든 것은 현실적 상황으로부터 출발해서, 이론과 실천이 서로 결합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시각을 망각하고 포기했으며, 심지어 반대했다”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실사구시를 통해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2) 등소평의 실천론
해리슨 E. 솔즈베리,『새로운 황제들』(서울: 다섯수레, 1993)
김덕환『중국의 어제와 오늘』(http://myhome.naver.com/mugam20/)
조너선 D. 스펜스 『현대 중국을 찾아서』(서울: 이산, 1998)
上揭書
姜春華, 前揭書
金永文徐輔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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