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과 천민신분제도를 철폐한 사무엘 F 무어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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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양반과 천민신분제도를 철폐한 사무엘 F 무어 선교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860년 출생하여 13세에 기독 신자가 되었고, 선교사명을 회심한 후 1892년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함. 1892.9.24 초기 한국교회에 아내와 함께 미국북장로교회 선교사로 파송됨. 1906년 12월 22일 46세에 15년 간의 선교사역 끝에 장티푸스로 순직하였다.
1. 백정해방운동 < advocacy - 대변 >
천민계층에 있던 인간취급 받지 못한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다. 그들이 예수를 믿고 예배에 출석하였으나 양반들은 백정과 같이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항의하면서 교회출석을 거부하였다. 무어선교사는 양반출신 교인들을 설득하였다. 또 무어선교사는 그들에게 미국에서도 유색인종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과 함께 예배 드리지 않는 사례를 설명하면서 그것은 이교주의에서 나온 잘못된 사상이라고 가르쳤다. 그때, 사회계급주의에 인습 되었던 양반출신 교인들은 무어 선교사 곁을 떠나 홍문섯골에서 따로 예배를 드렸다가 그 후 무어 선교사의 성경적 교훈을 깨닫고 다시 돌아오게 되는 일이 있었다. 무어선교사는 영적인 그리스도의 복음뿐 아니라, 그들의 현실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문제해결을 위해 앞장섰던 것이다.
①백정에 대해서
백정은 일반인과 떨어져 읍 밖의 일정지역이나 농촌촌락의 외진 곳에 집단을 이루어 살아야 했다. 이들은 어린아이에게조차 항상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소인이라 부르며 일반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백정은 옷차림 새에서도 일반 양인과 차별되었다. 이들은 일반인이 쓰는 검은 옷의 갓을 쓸 수 없었다. 상여도 사용할 수 없었고, 묘지도 일반인과 따로 자리잡았으며, 사랑도 만들 수 없었다. 이외에도 백정은 결혼할 때도 말이나 가마를 타지 못하였고, 여자의 경우에는 비녀를 꽂아 머리를 올리지 못하였다. 이러한 백정이 금기를 어겼을 때는 그 지역 주민들이 모두 동원되어 백정을 처벌하였다. 한 예로 1809년에 개성지역의 백정이 결혼식에서 관복을 착용하였고 일산을 썼다고 해서 그 지역 주민들이 그 백정을 난타하고 그의 집을 부수어 버린 사건을 들 수 있다. 사회적으로 짐승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던 백정들이 주로 도축업에 종사하였으나 그 외 천하다하여 일반인이 하지 않는 고리제조업, 악기연주나 노래 그리고 간단한 무용이나 재주로써 구걸하면서 유랑하는 소위 ‘창우’생활 등을 하였다. 조선시대 수많은 오만가지 제사를 드리며 아무 보수 없이 일했다.
②백정의 유래
공자, 제자들의 가르침에 공자는 사람들은 도살되는 짐승의 비명을 듣고 참을 수 없으므로 모든 귀족과 학자들은 도살장을 동리에서 떨어지게 하는데 동의해야 한다고 말했고 고상한 심성을 지닌 사람들은 유덕한 삶에 대한 생각을 버릴 수 없어 짐승들을 잡는 비명을 들을 수 없다고 하여 도살을 생업으로 하는 백정들을 천민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 틀림없다고 함. 조선시대 수많은 오만가지 제사를 드리며 아무 보수 없이 행하여졌다. 백정은 500년 이상 천대 받아온 계급이었다.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거지는 신분이 높아져서 사람이 될 수는 있어도 백정은 그럴 수 없다고 했을 정도로 비천하고 소외된 계층이었다.
③신분철폐를 위해 어떤 일을 했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형식적, 제도적으로 해방이 되었으나 천민신분에 대한 해방이라고 할 뿐 백정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실제적인 해방을 위해 무어선교사는 백정 박가와 함께 고종황제와 내무대신에게 수 차례 탄원서를 제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