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경당 한국 고대국가에 있어서의 미성년 집회의 일유 제이 기백 논문 비평
태학과 성격, 입학자격, 교육내용, 교육 목적 등에서 대비되는 경당의 기본 관점은 이기백에 의한 연구 결과로부터 시작했다. 뒤에 연구된 연구 성과를 토대로 경당을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초기 연구자인 이기백의 연구 성과를 보는 것도 큰 의미를 지니다. 초보자로서 최초의 어떤 주제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제공한 연구 성과를 보는 것은 연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방향성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연구 논문을 읽어갔다.
□ 논문요약
이 논문은 신구당서의 기록을 토대로 기존의 연구자들이 기록에 적혀 있는 데로만 해석하여 경당을 사립학교로, 문무겸비교육 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제시하며, 그 이상의 관점이 없음을 지적하면서 논문은 크게 위 논문은 세 가지 방향을 살펴보았다. 첫째, 고구려에 있어서 미성년집회의 문제를 다루었다. 둘째, 경당과 화랑도를 비교하였다. 셋째, 경당과 고구려 군사제도를 비교하였다.
첫째, 고구려의 미성년집회 문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초 단재 신채호는 고구려에도 신라의 화랑도와 같은 유사한 청년단체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료의 뒷받침을 받지 못해 후대의 연구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내려왔다. 물론, 고구려에 있어 미성년남자집회를 부정하는 견해는 삼품창영의 견해로 남자집회의 성격은 남방문화권임을 강조했다. 이는 이 후 유목 및 수렵생활의 사회와 농경생활사회의 차이를 설명하는 큰 테두리로 인정되었다. 사실 삼품창영의 입장은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한 인상을 주지만, 연구자는 고구려 경당도 신라의 화랑도와 견줄만하다고 생각하며, 고구려에도 원시남자집회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둘째, 경당과 화랑도의 비교이다. 경당 역시도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미혼자들의 집회처이며 그 구성원은 미성년이라는 점은 화랑도와 일치한다. 고구려의 경당 역시 신라의 화랑도와 마찬가지로 미성년집회의 전통으로 이은 것으로 삼품창영의 이론을 부정했다. 더 나아가 미성년남자집회를 기준으로 남방과 북방문화권을 나누는 것 자체가 문제이며, 만약 미성년집회를 근거로 나누고자 한다면, 고구려와 신라는 동일한 문화권임을 주장했다.
셋째, 경당과 고구려 군사조직에 관한 것이다. 연구자는 이 점에서 경당의 설치 위치와 미혼자제의 신분에 관점을 갖고 설명한다. 연구자는 이 두 가지 관점에서 볼 때, 경당은 국민개병제를 실시함에 따라 촌락공동체에 남아 있던 연령별 남자집회가 새로운 의미에서 사회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남자집회가 군사조직으로 개편되었고, 이는 지방의 평민을 군사조직에 편입시키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경당이 종교적, 교육적 기능이 있었을 것이나 경당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군사적 기능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경당의 탄생 배경이라고 이해한다. 다만, 이렇게 하더라도 경당을 국가기관인 것처럼 생각할 수는 없다고 보고 있다. 배경은 국가의 목적으로 개편되었으나 공동체적 성격은 여전히 남아 있고, 이는 경당과 화랑도의 공통점이다. 또한, 그 시기도 중앙 태학이 설립한 372년 이후로 보고 있다. 그 근거로는 지방의 발전 정도를 고려했다. 연구자는 세부적으로 장수왕의 평양천도 이후에 경당이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 연구목적, 연구문제, 논증과정, 타당성, 논문의 의의
이 논문은 삼품창영의 논리를 최초로 반박한 논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기백은 우리나라 국사학계, 특히 고대사 부분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주장은 한국 고대사를 규정하는 기본으로 작용했다. 이기백의 논문은 교육학계를 떠나 역사학계에 큰 의미를 가진다. 물론, 최초라는 수식어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 이후 대부분의 내용이 수정되고 반박되었을지라도 초기의 연구로서 갖는 몇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첫째는 기존의 삼품창영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둘째는 한국의 문화권을 동일문화권임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삼품창영의 논리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남방문화권과 북방문화권을 구분하고 있었다. 다만, 그 근거가 성년식은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를 통해 볼 때, 부여, 고구려, 백제의 연결된 점과 이와는 다른 신라의 문화권에서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더욱이 최근에는 신라는 부여, 고구려, 백제와 다른 흉노의 후예라는 학설이 인정받고 있다. 그 구체적인 유물적 증거가 신문왕의 비와 토기이다.
비평에서 문화권을 언급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지만, 이 연구는 삼품창영의 식민지 사학을 반박하는 논리로 적용한 점이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이후 국민개병제의 원칙에 입각한 경당은 많은 비판을 받지만,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한다.
□ 비평을 끝내며
수업시간에 문화에 대한 이 논문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다. 문화권을 선정하는 데 있어 언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사양지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등이 주요 문제였다. 늘 생각하는 문제지만, 역사는 사실로서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어려운 점은 사실을 사실로 가르친다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 몇 줄의 단편적인 기사와 문구를 가지고, 그 문제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해석하는 사람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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