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무영李龍九의 생애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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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설가 이무영李龍九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무영은 1908년 충북 음성군에서 태어났다. 5세 때에 충북 중원군 용원리에서 이사, 8세 때인 1916년 사립 용명학교에 입학했다. 이무영은 용명학교를 졸업한 1920년 상경하여, 휘문보고에 입학하여 수학 하나 1925년 중퇴하고 도일, 1년간 고학하다가 일본 작가 가토오 다케오 댁에 기숙하면서 4년간 작가수업을 한다. 이 무렵 그는 도꾸다 슈우세이 등 일본 작가와 불문학, 노문학 등 많은 문학 작품을 체계 있게 통독한다.
이무영은 1926년에 처녀 장편 ‘의지 없는 청춘’을 1927년에 장편 ‘폐허의 울음’을 간행하나 별반 인정을 받지 못한다. 1929년 귀국하여 초등학교 교원, 출판잡지사 직원으로 전전하면서도 문학의 길에 정진한다. 또한 1930년에는 용명학교의 건물을 빌어 청년학교를 만들어서 초등학생과 청년들을 지도하기도 한다.
이무영은 1930년대에 단편 ‘아내’를, 1932년에 중편 ‘반역자’, 단편 ‘두 훈시’, ‘흙을 그리는 마음’을, 1933년에는 구인회 본명 용구(龍九). 충청북도 음성(陰城)에서 출생하였다. 1925년 도일, 세이죠[成城]중학교에 다니다가 일본작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 문하에서 수업, 1932년 장편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을 동아일보(東亞日報)에 연재, 이어 《B녀의 소묘》 《창백한 얼굴》 《오후 영시(零時)》 등의 단편과 희곡 《탈출》을 발표함으로써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했다.
1933년 이효석(李孝石) 등과 9인회 동인이 되었고 1934년 동아일보사 학예부 기자가 되었으며 1936년부터 문예지 《조선문학》을 주재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농촌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제1장 제1과》 《흙의 노예》 등 우수작들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말(1942∼1945)에는 《대동아전기(大東亞戰記)》 《개천촌 보고》 등 친일적인 글들을 남겼다. 1951년 해군정훈감(海軍政訓監)이 되고 문총(文總) 최고위원을 역임했으며, 1956년 《농부전초(農夫傳抄)》로 제4회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작품에 《명일의 포도》 《세기의 딸》 《먼동이 틀 때》 《농민》 등이 있고, 단편집 《취향(醉香)》 《산가(山家)》 등이 있다.
에 가입하였으며 단편 ‘류바슈가’, ‘나는 보아 잘 안다’를, 1934년에 단편 ‘B녀의 소묘’, ‘창백한 얼굴’ 등을 발표하는데, 이들 작품은 대개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설정, 빈궁의 현실을 묘사한, 경향성이 농후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무영은 1934년 동아일보사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 1935년 결혼하여, 이 해에 중편 ‘산가’, ‘만보노인’, 장편‘먼동이 틀 때’, 1936년에 단편 ‘유모’, ‘분묘’ 등을 발표한다. 그는 1936년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가되자 이흡과 함께 순문예지 「조선문학」을 창간하나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1939년 그는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3년 전 이미 낙향한 이흡을 따라 경기도 군포에서 10리 떨어진 궁촌으로 이사, 농촌 생활을 소재로 한, 단편 ‘궁촌기’, ‘제1과 제1장’ 및 1940년에 단편 ‘흙과 노예’등을 발표함으로써 농촌문학에로의 뚜렷한 전환의 경향을 보인다.
이후 1945년까지 단편 ‘민권’, ‘이름없는 사나이’, ‘원주댁’, ‘문서방’, ‘모우지도’, ‘귀소’, 장편‘향가’ 등을 발표하며, 1934년에는 친일적 작품으로 조선예술상 수상작인를 발표하기도 한다.
해방 이후 그의 농촌소설은 1946년의 단편 ‘청개구리’, 1947년의 단편 ‘구곡동’, ‘나랏님전상사리’등으로 이어지며, 이는 그 후, 구한말 이후 민족 수난기의 한 농민 영웅의 저항과 투쟁을 그린 연작 장편‘농민’, ‘농군’, ‘노농’에서 보다 뚜렷한 역사의식과 폭넓은 작품적 조를 보여준다.
해방과 625동란을 겪으면서 이무영은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 출강, 혹은 해군에 복무하는 등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 장편‘삼년’, ‘젊은 사람들’, ‘역류’, ‘창’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해 해방 후나 625동란을 전후한 혼란한 사회상을 그리는 한편, 단편 ‘연사봉’, ‘일야’, ‘숙’, 장편 ‘계절의 풍속도’ 등 일련의 작품을 통하여 당시 도시 지식인의 애정의 윤리를 다루기도 한다. 1955년, 국방부 정훈국 차장을 거쳐 해군에서 예편한 그는 1956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고, 대학에 출강하며 창작활동을 계속하던 중 1960년 급병으로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