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세 때 임명된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 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 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사와 황해도관찰사를 맡아서 지방의 외직에 대한 경험까지 쌓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선 정치에 대한 폭넓은 경험을 하였고, 이러한 정치적 식견과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40세 무렵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낙향하였다가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관하였다. 이후 호조 이조 형조 병조 판서 등을 맡으며, 평소 주장한 개혁안의 실시와 동인 서인 간의 갈등 해소에 적극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무렵 《기자실기》와 《경연일기》를 완성하였으며 왕에게 시무육조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 서인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도 점차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까지 중립적인 입장를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 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과 강릉의 송담서원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②이황[1501~1570]
경북 예안출생이다. 12세 때 숙부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18)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42년 검상(檢詳)으로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사인으로 문학 교감 등을 겸직, 장령을 거쳐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 이기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이어 사복시정이 되고 응교등의 벼슬을 거쳐 1552년 대사성에 재임, 1554년 형조 병조의 참의에 이어 1556년 부제학, 2년 후 공조참판이 되었다.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선조1)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을 지내고 이듬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 주자의 주장을 따라 우주의 현상을 이기 이원으로써 설명, 이와 기는 서로 다르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관계에 있어서, 이는 기를 움직이게 하는 근본 법칙을 의미하고 기는 형질을 갖춘 형이하적 존재로서 이의 법칙을 따라 구상화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기이원론을 주장하면서도 이를 보다 근원적으로 보아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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