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설문학 연구 고전문학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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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규보의 설문학 연구 고전문학 분과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설’은 한문 양시의 하나로 근대 이전에는 활발하게 창작되었다가 오늘날 더 이상 창작되지 않는 양식으로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설’양식은 설명적인 설과 설득적인 설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설명적인 설은 사람이나 건물의 이름을 지은 이유를 설명하거나 도나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는 설들이 해당하며, 설득적인 설은 자녀를 훈계하기 위해, 혹은 세상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교훈을 삼기 위해 지어진 설들이 포합된다. 대체로 후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설은 ‘우언적인 설’에 많이 해당되고 전자의 경우에 해당되는 설은 ‘직서적인 설’이 되겠다.
이규보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문집을 남겼다. 그의 문집에는 ‘설’작품이 12편 수록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에 모두 수록된 작품성을 인정받은 글이다. 선행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의 경우 가장 이해하기 쉬운 작품이며 반면 과 은 논리적인 사고를 요하기도 하고 우언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여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그리고 이규보의 설 12작품은 단일한 기준에 따라 나누기 어려운 다양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설의 대표적인 유형을 위의 두 가지로 구분하여 두 유형의 작품이 어떤 원리로 구성되는지 알아보았다.
(1) 형 설
이 설은 집을 고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야기는 비교적 단순한데, 전반부에는 노후한 행랑채를 수리하면서 경험한 사실, 후반부에는 집수리 경험이 주는 교훈을 적고 있다. 이는 개인적인 체험에 국한될 수 있는 특별하고 개별적인 사건을 하나의 보편적인 교훈으로 이끌어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사고 과정은 오늘날의 신변잡기의 기록으로 일컬어지는 수필문학에도 적용될 수 있다. 수필이 문학으로 포함될 수 있는 까닭은 수필이 가지고 있는 개별성과 형상성에 있다. 또한 한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보편적인 깨달음이나 진리를 널리 알린다는 점에서 교술 문학으로서의 성격도 지닌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과 같은 설 유형은 오늘날 수필문학과의 통시적인 연관 관계를 고려해볼 수 있다.
(2) , 형 설
의 주제는 ‘사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미물도 평등하게 받아들어야 한다’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거사와 손님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지만 실상은 스승과 제자 혹은 도를 깨우친 자와 무지한 자의 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거사가 손님의 잘못을 깨우치며 바른길로 훈계하는 듯 보인다. 그런데 내용을 다시 잘 살펴보면 손님의 입장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에도 합당한 주장이지만 거사의 주장은 비상식적이고 억지에 가깝다. 앞뒤 모순되어 보이는 이러한 이야기는 뿐만 아니라 이 또한 그러하다. 이 두 작품은 두 사람의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영택 초기소설 연구
(현대문학 분과 )
1. 와 늘봄
최초의 순문예지 는 일본에서 유학중이던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에 김환이 합류하면서 탄생했다. 당시 일본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계몽주의적 담론 위주로 편집되던 에 대한 반감이 그 계기가 되었다. 주요한의 「불노리」는 한때 최초의 근대 자유시라는 평가를 받았고 김동인은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을 넘어서는 소설 미학을 확립했다는 문학사적 위치를 점했다. 반면 전영택은 상대적으로 문학사적 위치가 낮게 평가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전영택 초기 소설의 해석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 주제론적 측면에서 그의 소설을 의미화하고자 하였다.
2. 전영택 약전
창간호에 단편 「혜선의 사」를 발표해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창간에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매부인 방인근이 1924년에 을 창간하도록 하는데도 깊이 관여했다.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고 서울감리교 신학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27년에는 아현교회 목사로 취입한 이후 목회활동에 전념했다. 이 즈음부터 소설 창작은 다소 쯤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1932년 귀국한 그는 민족운동에 깊이 개입하였으나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고초를 격은 후 전향서를 작성하고 친일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