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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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공자孔子의 생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유교의 개조(開祖)이자 동양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지성선사(至聖先師) 공자는 성이 공(孔)이고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후세에서 그를 공자라고 통칭하나 자(子)라는 말은 당시에는 선생과 같은 남자에 대한 존칭이었다.
공자는 주(周) 영왕(靈王) 22년(B. C 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노(魯)나라, 즉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노나라의 대부(大夫)로 무용(武勇)을 떨친 바 있는 숙량흘(叔梁紇)이며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맹인이었으며 춤추는 여자였거나 무당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공자는 세 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무사의 피를 받아 체구가 당당했고 보통사람보다 훨씬 컸다고 한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공자는 아버지와는 달리 무(武)를 멀리하고 문(文)에 기울었다. [ 열 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 ] 고 한 것은 그가 문화적 전승자로서의 길을 내디뎠음을 후일에 밝힌 것이다. 특히 공자는 어려서부터 예(禮)를 중시했고 예(禮)에 대한 것을 많이 배웠다. 에 공자가 노자(老子)에게 예(禮)를 물었다고 한 것은 사실여부와는 다른 뜻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에 보면 공자가 [어려서 자기는 천했으므로 잡일에 능통하다(吾少也賤, 故多能鄙事)]고 한 말이 있듯이 일찍이 그는 잘 태어나지 못했다. 뿐만이 아니라 그가 일찍이 누구에게 어떠한 학문을 배웠는지도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공자는 노에서 태어났고 노나라가 주(周)의 전통을 바로 이어받은 나라였으므로 주의 문화를 정통(正統)으로 삼고 이를 이어받고 더욱 발전시키고자 했으며 특히 주문화의 창설자 주공달(周公旦)을 존경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20세 경에 결혼한 공자는 장자 이(鯉, 자는 伯魚)를 낳았으나 공자보다 일찍 죽었다. 공자의 까다로운 성격을 견디지 못해 부인이 도망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기타 상세한 가정사정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 30에 사회에 나섰다(三十而立) ] 고 한 공자 앞에 전개된 중국사회는 바야흐로 춘추(春秋)의 난맥상이 두드러졌던 때다. 공자의 조국 노나라에서도 삼환(三桓)이라고 하는 신흥 세도가(孟孫氏, 叔孫氏, 季孫氏)들이 노의 황실을 누르고 전횡(專橫)하고 있었다. 더욱이 노의 군주 소공(昭公)이 이들을 치려다가 도리어 패하고 제(齊)로 망명을 했고 칠 년의 망명생활 끝에 그가 객사하자 임금 없는 노나라의 실권은 계손씨를 중심한 삼환씨(三桓氏)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신하(臣下)의 명분을 엄격히 밝히는 공자는 참다못해 소공(昭公)의 뒤를 쫓아 제(薺)로 갔다.(B. C 517) 제에 가서 어떻게 지냈고 또 얼마나 있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에 보면 제의 경공(景公)이 정치에 대하여 묻자 [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명분과 자기의 자리를 지킬 것을 밝힌 말이 있다. 또 공자가 제에 있는 동안 옛날의 순(舜)임금의 음악 소(韶)에 도취되었다는 기록도 에 있다.
한편 노나라에서는 객사한 소공의 뒤를 이어 정공(定公)이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실권은 삼환씨가 잡았고 그 중에서도 계손씨의 가신(家臣)인 양호(陽虎)가 전권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삼환씨가 지나치게 횡포를 부리는 양호를 실각시키고 제에서 돌아온 공자를 발탁해 썼다. 공자는 52세(B. C 501)에 중도(中都)의 재(宰)라는 벼슬에 올랐다. 결코 높은 벼슬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듬해 협곡(夾谷)이라는 곳에서 열린 제와 노의 국제회담에서 제나라의 책략을 분쇄하고 노의 국위를 선양한 공으로 공자는 대사구(大司寇)라고 하는 최고 재판관의 자리에 올랐다. 원래 공자는 신흥 세도가들에 의한 무력적이고 비윤리적인 하극상(下剋上)을 반대했다. 따라서 공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삼환씨의 세력을 꺾고 노나라의 임금을 제자리에 올려놓으려고 애를 썼다. 한때는 공자의 노력이 성공하는 듯 보였다. 즉 공자의 제안에 동의한 숙손씨와 계손씨는 스스로 자기들의 성벽을 부수고 병력을 해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맹손씨는 반격을 해왔고 마침내 공자를 내쫓고 말았다. 이에 공자의 정치적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공자는 나이 56세(B. C 497)에 모국인 노를 떠나 약 14년간을 두고 다른 나라를 방랑했다. 즉 위(衛), 조(曹), 송(宋), 정(鄭), 진(陳)을 찾았고 다시 위와 진을 거쳐 채(蔡)와 초(楚)로 갔다. 그간에 세 차례 노에 돌아오기도 했으나 그의 방랑의 여정은 같이 불행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뿐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그는 수난까지 당했던 것이다. 송나라에서는 환태로부터 생명의 위협까지 느낄만한 박해를 받았다. 또 광(匡)이라는 지방에서는 양호(陽虎)로 오인되어 욕을 본 일도 있었다. 또 진(陳)과 채(蔡)에서는 먹을 양식이 떨어져 고생하기도 했다. 공자는 그의 이상인 인(仁)을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위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덕 있는 임금을 만나 그를 도와 천하를 바로잡고자 했다. 즉 바른 의미에서의 정치참여를 갈망했다. 그러나 끝내 그의 정치적 포부는 달성되지 못했고 현실개혁의 의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이에 공자는 젊은이들의 교육, 미래를 짊어질 엘리트 즉 지식인들의 양성과 아울러 저술(著述)에 뜻을 굳히고 그의 나이 69세(B. C 484)에 다시 노(魯)로 돌아왔다.
현실참여와 정치개혁에 실패한 공자였으나 교육과 학문에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수천 명의 제자들이 운집했고 학문과 덕행에 뛰어난 인재들이 속출했다. 공자는 참다운 인식(知)과 인류애(仁)와 불굴의 실천(勇)을 군자의 삼달덕(三達德)으로 가르쳤다. 특히 그는 하(夏), 은(殷), 주(周)의 문화전통의 집대성이라 할 시(詩), 서(書), 예(禮), 악(樂)및 역(易)을 재정리 재평가하여 정식 커리큘럼으로 채택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전통문화의 계승과 신문화의 창조를 이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