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효용론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문학의 필요성 문학 비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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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학의 효용론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문학의 필요성 문학 비평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문학의 효용성에 대해 말하자면 할 말이 많다. 문학은 문자가 있기 전이 아니라 말이란 것이 있을 때부터 존재해왔을 것이다.(구비문학을 말한다.) 지금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질이 물질을 재단하고 때로는 사람마저 재단하는 시대에서도 문학은 가느다랗지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사람은 문자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 외에도 그 문자로 많은 일을 한다. 주된 일은 정보를 가공하고 공유하며 기록하는 데 쓰이는 문자이지만 여건이 된다면 그 이상의 일을 하는 게 문자이고 그 이상이 바로 문학이었다. 문학은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했다. 문학을 소설이나 시로 축약 시켜 말한다 해도 그 역사는 상상 이상으로 길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런 것일까. 왜 문학의 역사가 이토록 긴 것일까. 난 그 이유에 흥미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즉 쾌락을 탐하는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이는 사실 물질을 탐하는 인간의 본성과 매우 닮아 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은 날 때부터 흥미와 즐거움을 탐하는 존재였다. 우리들은 이런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문학을 창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사라질 수 없다. 인간은 근본적인 열망은 흥미와 쾌락에 있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물질이 필요하다. 문학은 이런 점에서 물질의 필요성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이유로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에서 사라질 수가 없다. 요즘 출판 시장이 힘들다고 한다. 책을 사는 사람들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설사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베스트셀러 외엔 잘 안 읽으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반면에 E북 시장은 그 규모가 작지만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왜일까. 문학의 필요성은 작든 크든 현대사회에 그 비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학은 시대에 따라 비중이 줄어들었다가도 늘어나기도 한다. 그러니 지금은 문학이 효용론 적으로 홀대 받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또 다른 위치에 설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문학은 현대인이 물질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현대에서 존재하고 있다.
주위의 사물 중에 단 하나만을 위한 존재가 있을까? 단 하나만을 위한 존재, 그것은 가치 있는 존재일까? 세상에 단 하나만을 위한 존재를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문학은 한 사람을 위한 존재이다.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고 그 한 사람이 있기에 가치 있을 수 있다. 문학이 왜 한 사람을 위한 존재일까? 그것은 사회변화를 시킬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한 사람을 위한 존재다.
현대의 사회는 ‘표백’사회라고도 불린다. 큰 문제점이 있는 듯 보이나, 그 속에서는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다. 우리 세대의 대학생들 또한 표백세대라고 부른다. 8~90년대와 다르게 적극적으로 싸워야 하는 가치가 부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이념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견고하고 완벽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체제 내에서 ‘아니’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체제’가 모순적인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 체제에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모순을 보여주게 된다.
이미 이러한 것들을 깨뜨리기 위해 사람들은 많은 단체를 조직해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 체제에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다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이 무시무시한 구조는 그들이 무너뜨리기엔 너무 단단했다. 지금도 이러한 구조적 모순점을 발견하고 단체를 조직하여서 이 모순적인 체제를 바꾸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즉, 이제 단체를 조직해서 체제를 와해시키고 다시 그 체제를 쇄신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체가 아닌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서 바꾸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의문점이 많을 수 있다. 사회구조는 단체에 대해서는 굉장히 강력한 통제구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미시적으로 관찰해보면 개인, 개인 하나 하나의 사상과 행동들을 깊이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그들이 사회구조를 붕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아인슈타인, 테슬라, 마르크스 등 사회를 변혁 시키는 것에는 그들의 단체가 아니라, 그들 ‘개인’의 생각, 사상들이 있었던 것이다. 사회가 생각지도 못한 굉장히 작은 ‘개인’들이 큰 사회를 무너뜨리고 바꿀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였다.
이러한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변화 가능성을 주기에 가장 적합한 것은 ‘글’이다. 또한 ‘글’ 중에서도 ‘문학’은 그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제시해 준다. 그것은 ‘개인’들에게 사회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고 그들로 하여금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한다. 어떻게 문학이 그들에게 무기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문학’이 고도로 응축된 생각의 산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우리에게 하여금 그 자체로의 의미로만 수용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되고 다시 창조되어 수용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개인들은 문학을 봄으로써 창조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나아가 이러한 ‘창조적 생각’의 힘으로 사회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결국 문학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 개인들로 하여금 창조하도록 부추기기 위한 충분하게 새로운 내용들과 독특한 발상들이 필요하다. 그들이 창조하고 변형하기에 충분히 많은 내용들과 다양한 생각들을 담아야 할 것이다. 또, 그들이 무기를 갈고 닦을 수 있도록 용광로를 제공해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럼 그들은 문학이라는 양분을 통해 모순적인 사회를 변혁 시킬 수 있는 엄청난 아이디어를 창조해 낼 것이다. 그 한 사람의 생각이 나타나고 실천함으로써 사회는 단시간에 격변하게 될 것이고, 사회는 예상치 못한 ‘개인’에 의해 힘없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공산당 선언을 읽고 우리 시대의 문학의 필요와 효용성에 대해 논하는 것이 이 과제의 목적이다. 둘을 연관 지어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문학이라는 말 자체의 어려움과 아직은 대한민국에서 저항감 있게 느껴지는 공산당이라는 말의 조합은 꽤 난감하게 다가온다.
내가 듣는 또 다른 전공과목인 ‘현대 문학사’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일본의 평론가이자 지금은 철학자 및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 사람은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는 책을 섰는데, 이 점이 흥미롭다. 가라타니 고진은 한 때 근대 문학이 정치의 보충을 담당했으나 이제 문학은 더 이상의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고 단순한 흥미 위주의 사소한 읽을거리가 되었다며 근대 문학의 끝을 선포했다.
이는 마치 부르주아지 계급이 과거에는 역사적으로 매우 혁명적인 역할을 수행해왔으나, 이제는 정치적 지배권을 얻음으로 혁명적 가치를 잃었고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사라져야 될 존재로 인식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