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를 보고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예고편을 보고는 머리를 비우고 볼 수 있는 유쾌한 영화라고 생각하여, 임용시험이 끝나면 제일 먼저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예상대로 약 100분의 시간동안 감독이 곳곳에 꾸며놓은 웃음의 장치가 정말 깨알같았고 특히 완득이 옆집에 사는 예민한 예술가가 걸쭉한 욕을 할 때면 관객 모두가 박장대소했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웃음을 노리고 만든 대사와 상황이건만 그럼에도 결국 웃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장치가 있지 않은가.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는 이런 사소한 장치에도 비판적으로 굴러가는 머릿속 셈을 지우고 무방비 상태로 웃게 된다.
영화의 스토리는 사실 예고편 하나만 보고도 영화를 다 봤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통속적이고 뻔했다. 다만 거기에 다문화가정이라는 요소가 첨가되어 현재 우리 사회에서 회자되고 있는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는 점. 완득이는 본인의 말대로 완벽하게 불쌍한 놈이다. 영화가 전개부에 접어들면서 완득이는 킥복싱을 통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 이를 승화하는 돌파구를 찾게 된다. 처음 킥복싱을 했을 때 이성을 잃고 상대를 죽어라 패는 부분에서 완득이의 분노가 가장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그러나 관장의 호통과 함께 정신을 차리고 킥복싱을 싸움이 아닌 스포츠, 그리고 자신의 진지한 진로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에서 완득이의 분노가 덜 표출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 노동자인 핫산의 어색한 한국말, 동주선생의 입담 등 영화는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고 전개된다. 그러나 완득이가 처한 상황은 기막히게 처절하다. 얼굴에 분칠을 하고 광대춤을 추는 아버지와, 가출한 필리핀 어머니, 기초생활수급자로 분류될 만큼의 절대적인 가난은 완득이가 지고 있는 짐이다. 완득이의 아버지는 관객이 보기에 안타까운 사람이나, 어찌되었든 아들에게는 무책임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절망 속에서 대드는 아들의 뺨을 때리고 얼른 사과하는 것으로 갈등을 급하게 마무리하려 한다. 자신의 기구한 인생만을 부각하여 ‘난 이럴 수밖에 없었어’하며 정당화시키는 모습을 내가 아들의 눈으로 보자니 상당히 불편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나의 아픔은? 어머니는 또 어떠한가. 낳자마자 아이의 곁을 떠나버린 어머니를 완득이는 너무나 쉽게 용서했다. 완득이가 단 한 번의 원망과 미움의 과정 없이 그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새 구두를 사주는 것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며 해피엔딩이 되었다. 그나마 완득이를 위로해 준 것은, 스포츠라고는 하나 본질은 폭력성이 바탕인 킥복싱과 같은 반 여자친구와의 썸씽, 동주 선생의 관심인데, 이것은 모두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부수적인 장치일 뿐이다. 작가는 이러한 외적 장치를 설정하여 부모와 자식의 갈등의 본질적인 표출, 해소를 교묘하게 회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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