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사림파의 내적 분화와 문학적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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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6세기 사림파의 내적 분화와 문학적 지향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들어가는 글
한국문학사상사에서 16세기는 특히 중요한 시기이다. 문학에 관한 사상을 문학 사상이라
하면 문학사상은 일정한 철학적 사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오랫동안 유학이 그 역할을 했다. 그런데 유학의 문학사상은 동질적인 것이 아니었고 계속 주목할 만한 역사적 변화를 가졌다. 이러한 변화 중에 특히 주목되는 바는 13세기 이후에 신흥 사대부가 창조하고, 14세기 이후에는 성리학 또는 이기철학을 근거로 삼은 문학사상이 16세기에 온전한 깊이와 체계를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점에서 16세기는 위대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 성과가 17세기이후에 계승되고 극복되었다.
16세기 사림파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 김종직, 김굉필, 이황, 이이 에 대해서 그들의 문학과 사상중심으로 다루어 보고자 한다.
2. 사림과 사림파의 개념과 형성
사림이라는 용어는 고려말부터 사용되었다. 고려말에는 성리학자와 사장학의 인사를 통틀어 부르는 단어였다. 즉 선비의 무리를 일컬었다. 조선초에 이르러 사림은 성리학자의 무리를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그 후 이들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사림파를 형성하여 중종 중기에는 정치세력으로서의 사림파라는 역사적 의미의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사림의 형성 배경은 크게 정치적, 경제적, 학문적 3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정치적 배경
15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사회 경제적 변화에 조응하여 새로운 정치 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정권을 독점해 왔던 훈구 세력이 양반 관료제의 모순을 야기하고 있었고, 이에 수반하여 과전법(科田法)의 붕괴와 지주제의 발달, 상품의 유통과 공납제(貢納制)의 모순 심화, 군역제도(軍役制度)의 붕괴, 국제 교역의 발달 및 마찰 등 새로운 사회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이 사림파였다. 성종 초, 사림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 세력과 권력구조로 기인한 정치 문제 때문이었다.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 구조로 인해 공신이 과다하게 창출되고, 공신이 집중된 권력을 장악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것이 근본 문제였다. 그러므로 당시에 제기된 정치 과제는, 훈구의 비리를 막고 나아가 훈구를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또한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 구조를 바꾸어 적절히 균형 잡힌 권력 구조를 만들어 훈구의 발생을 근원적으로 막는 일이었다. 따라서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권력을 분화시키고 정치의 참여 층을 넓힘으로써 조화로운 정치의 운영을 모색하는 질적인 정치과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변동은 사림이 중앙정치에 등장하면서 구체화되었다. 사림이 중앙에 진출하는 중요원인이 훈구 주도의 정치체제에서 오는 권력의 오용과 이로 인한 향촌의 불안정의 극복에 있었으므로, 새로운 정치과제의 모색과 사림의 등장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초기 사림은 훈구의 비리를 지적하면서 훈구 정치 체제의 문제점을 풀어갔다. 성종 중반 이후 홍문관을 통해 사림은 덕을 중심으로 하는 인사 방식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사림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의 진출을 확대, 강화하였다. 나아가 공론 정치를 통해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재야의 사림은 간접적인 정치세력으로 수용하였다. 이로써 권력 독점 문제를 해결해 갔다.
경제적 배경
사림은 본래 재야의 사족으로, 선진 농법을 활용하여 향토를 적극 개발함으로써 그들의 세력도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재야 사족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학문을 닦고 유한한 정경을 선호할 수 있었다. 더욱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재야 사족이 자리 잡은 곳은 관청과 멀고 시정과 떨어진 곳이라, 재야 사족만의 주거지역의 차별화가 이뤄졌다. 이들은 재경관인으로 이루어진 경재소(京在所)와의 연결을 꾀함으로써 향촌사회의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 상호간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하층민을 통제하기 위해 여러 조직을 만들고 향촌 사회를 운영해 나갔다. 이러한 재지 사족들이 사림파 형성의 인적 배경이 되었다. 사림의 경제적 배경, 위치적 특성은 그들의 문학에서 드러난다.
학문적 배경
사림은 가학을 통해 학문이 성취된 다음에 경향간을 왕래하는 과정에서, 혹은 학문적인 토론과 질의와 같은 접촉을 통해 사우 관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는 사림이 성리학이 훈도된 이들이 본관지 또는 부모 소재읍의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는 예가 많았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 그 곳에서 그들은 지방 교육을 진작하고 성리학적 사회윤리를 몸소 실현함으로써 그들의 문하를 만들었다. 즉, 혈연적이고 지연적인 조직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김종직과 그의 문인인 김굉필, 정여창의 교육 활동에 의해 영남. 기호지역 사림들의 인간적, 학문적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성종 16년(1485년)이후 훈구세력에 대응되는 정치세력. 즉 사림파로서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