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모어의 Utopia
1. 저자의 생애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
에라스무스는 자랑스러운 친구 토마스 모어가 런던탑에서 순교했을 때 “토마스 모어는 누구보다도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국은 과거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그와 같은 천재성을 다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모어는 일반적으로 영국의 법률가정치가휴머니스트로 『유토피아』를 저술하여 근대 최초의 사회주의자로 불린다. 런던의 재판관 존 모어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는 캔터베리대주고 존 모턴을 섬겼다. 라틴어 학교에서 수학한 후 이어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하여 그리스 어와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후 그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이 학교를 그만두고 런던에서 법률공부를 했다. 1499년에 에라스무스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그들 사이의 우정이 시작되었다. 유럽 휴머니즘의 우두머리였던 에라스무스는 모어가 본래 지니고 있던 성향을 강화시켜 역사연구를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모어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또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의 휴머니스트이자 신학교수인 존 콜렛 이었다. 이 저명한 휴머니스트들과의 우정어린 교분은 모어의 재능과 인품의 계발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어린 시절에 시작된 학문연구와 당시ㅢ 경제관계에 대한 탐구를 심화시켜주었다. 그렇지만 모어는 직업적인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며, 곧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변호사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24세 때 하원의원이 되었으나, 헨리 7세가 의회에 청구한 왕녀의 결혼비용의 삭감을 주장하여 왕의 미움을 받고 정계를 물러난다. 그 후 헨리 8세가 즉위할 때까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왕의 사절로 유럽대륙에 파견된다. 그가 대륙에 머물면서 여가를 이용해 집필한 것이 바로 유명한 『유토피아』다. 1517년 왕의 간청에 의해 정치 생활에 복귀, 하원의장을 거쳐 1529년에는 대법관이 되었다.
1532년 헨리 8세는 형수이자 부인인 캐서린이 왕자를 낳지 못하자 그녀와 이혼하고 궁녀 앤 볼레인과 결혼한다. 모어는 앤 볼레인을 정통왕비로 선언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1534년에 그는 국왕이 영국교회보다 우위에 있음을 골자로 하는 소위 ‘수장령’을 거부했기 때문에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이처럼 법률가로서 또한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의 양심을 지키다 1년 동안 ‘런던탑’에 투옥되었다가 참수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모어의 400주기 기일에 즈음하여 그가 교황 정책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그를 성자의 명부에 올렸다.
그의 작품으로는 『우신예찬(愚神禮讚)』(1511), 『피코 델라 미란돌라전』(1510), 『리처드 3세전』(1543) 등이 있다.
2. 집필 배경과 목적
1) 시대적, 사상적 배경
▶양이 사람을 먹어치운다 모어의 이념과 저서에는 그 시대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 계의 갈등이 반영되어 있다. 이는 현실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나오게 된 것이며, 이런 절 망적 현실을 그는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15세기 말, 16세기 초 사이에 영국에서는 자본 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가 형성되었고, 봉건질서의 해체가 일어났다. 모어는 부를 축적 한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부상, 그리고 이와 동시에 대규모로 이루어진 농민들의 프롤 레탈리아화와 빈곤을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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