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1  톨스토이-1
 2  톨스토이-2
 3  톨스토이-3
 4  톨스토이-4
 5  톨스토이-5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톨스토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톨스토이
남러시아 툴라 근처의 야스나야 폴랴나 출생.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임과 동시에 문명비평가 ·사상가로서도 위대한 존재였다
톨스토이의 생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는 1828년 8월28일에 러시아 남부 툴라현의 야스나야 폴랴나에 있는 부친의 영지에서 태어났다. 톨스토이가는 오래된 러시아의 귀족 가문이며, 톨스토이의 어머니는 볼콘스키공작의 딸이다. 그의 부친과 모친은 의 니콜라이 로스토프와 공작 딸 마리야와 같은 등장인물들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그들은 가장 훌륭한 러시아의 귀족에 속하였으며 본래의 태생이 상류 지배 계층에 속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대의 다른 여러 작가들과 톨스토이를 명백히 구분 지워 주는 점이다. 그는 항상 계급의식을 갖고 있었던 귀족이었으며(이러한 계급의식이 부정적이 되었을 때조차도), 인텔리겐치아(넓은 뜻의 인텔리겐치아는 지적 작업에 종사하는 중간적인 사회계층, 곧 일반적으로 지식인을 의미한다)들과는 관계가 소원했다.
톨스토이는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을 여러 형제들로 이루어진 대가족 속에서 모스크바와 야스나야 폴랴나를 오가며 보냈다. 그는 자신의 전기 작가인 비류코프를 위하여 그가 글을 썼던 메모지에 어린 시절의 인간적인 환경에 대하여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는 두 살 때에 어머니를 잃었고 아홉 살 때에 아버지마저 잃었다. 이후의 그의 교육은 그의 큰엄마인 에르골스키 부인이 맡았다. 그리고 그녀는 의 소냐를 위한 출발점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1844년에 톨스토이는 카잔 대학에 입학했다. 여기에서는 그는 처음엔 동방 언어를 공부했지만 후에 법학을 연구하였고, 1847년에 대학을 중퇴하였다. 1849년에 그는 야스나야 폴랴나에 정착했다.(여기에서 그는 농부들에게 도움을 주려했으나 곧 지식이 결여된 열성의 비효율성을 알고 후에 생애의 많은 부분을 대학에서 보냈다) 대학을 떠난 후에 그는 젊은 급우들과 마찬가지로 불규칙하고 환락에 가득 찬 생활(술, 도박, 여자)을 보냈다. 한마디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편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의 일기(톨스토이의 일기는 1847년 것부터 현존한다)에는 처음부터 삶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변호를 위하여 채워지지 않는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드러나고 있고 이러한 갈망은 그의 정신을 지배하는 힘으로 영원히 잔존하였다. 그의 일기는 자신의 문학인생에서 실험장 역할을 하였고 그가 보다 야심적이고 보다 분명하게 창조적인 작품을 쓰고자 한 첫 시도는 1851년에야 일어난다.
그는 그 해에 공허한 모스크바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카프카스로 떠났다. 여기에서 그는 체레크 강위의 카자크마을에 주둔하고 있던 포병대로 지원하고 사병계급으로 들어갔다. 1852년에 그는 최초의 이야기를 완성하여 이 작품을 지에 발표할 목적으로 네크라소프에게 보냈다. 이 이야기는 즉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문학계에서 톨스토이의 위치를 확고히 해 주었다.
톨스토이는 포대의 숙사에서 훨씬 안락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보냈다. 그는 충분한 여가를 확보하여 그 대부분을 사냥을 하면서 보냈다. 그가 참전했던 소규모 전투에서 그는 용맹스럽게 싸웠다. 1854년에 그는 장교 임명장을 받았고, 그의 요청으로 월러치아의 터키인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군대로 전보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실리스트리아의 포위 공격전에 참여했다. 동년 11월에 그는 세바스토폴리 수비대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그는 매우 중대한 전투를 수행했다. 그는 제4요새의 방어 전투와 흑강의 전투에 참여했고 이 전투의 서툰 작전을 시로 풍자했다. 세바스토폴리에서 그는 유명한 을 썼다. 이 작품은 포위 공격이 여전히 계속되는 동안에 지에 발표됨으로써 이 이야기들의 저자에 대한 세인의 일반적인 관심을 고조시켰다. 요새를 포기한 직후에 톨스토이는 휴가를 얻어 페체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그는 제대했다.
톨스토이의 생애에서 그가 문학계와 사이좋게 지낸 것은 크림 전쟁이후 바로 이 몇 년뿐이었다. 페체르브르그와 모스크바의 문인들은 그를 그들의 가장 유명한 사람중 하나로 환영했다. 후에 그는 허영심과 자만심이 가득한 체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그러나 그는 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는 너무나 귀족적이어서 이러한 반보헤미안적(사회의 규범이나 습속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이르는 말의 반대)인 인텔리겐치아들을 좋아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들은 지나치게 자의식이 강한 평민에 불과했다. 반면에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모임보다는 ‘사교계’를 선호하는 것에 분개했다. 그와 투르게네프는 이 문제에 관한 통렬한 풍자시를 주고받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모든 정신적 구조는 진보적인 서구주의자들의 성향과는 대치되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진술하는 방법에 그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진보나 문명을 신뢰하지 않았고 문학계와의 불일치는 그의 신작에 대한 그들의 실망으로 인하여 점점 커졌다. 이후로 그가 쓴 모든 작품들은 예술적인 완벽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어떤 발전도 보여주지 못했다. 그의 작품을 평하는 평론가들은 이러한 불완전한 작품의 실험적인 가치를 깨닫지 못했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그와 문학계와의 관계는 일찌감치 끝이났다. 이것은 투르게네프와의 유명한 논쟁(1861)을 야기시켰다. 그는 투르게네프를 모욕했고 후에 그 점에 대해서 그에게 사과했으나 결국 투르게네프와 절교하게 된다. 그가 친구로 지낸 유일한 작가들은 반동적인 ‘지주주의자’ 페트와 민주적인 슬라브주의자 스트라호프였다. 이 두 작가는 동시대의 진보적인 사상의 주된 경향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1856년부터 1861년 사이에 그는 페체르부르그와 모스크바, 그리고 야스나야 폴랴나와 외국을 전전하면서 보냈다. 그는 1857년에 외국 여행을 하고 유럽의 불주아 문명의 이기성과 물질주의에 혐오감을 품고 돌아왔다. 1859년에 그는 야스나야 폴랴나에 농민의 자제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고, 라는 교육 잡지를 발행했다. 이 잡지에서 그는 지식인들이 농민들을 교육시킬 것이 아니라 지식인들을 농민들이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진보적인 그룹들을 경악케 했다. 그리고 그의 큰형 니콜라이의 사망으로 인해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1861년에는 농노 해방령의 실행을 감독하도록 마련된 치안 판사직인평화의 중재자직을 수락하였다. 1862년 9월 오랜 주저 끝에 그는 궁정시의의 2녀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에게 구혼하여 결혼하게 된다.
그의 결혼은 톨스토이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건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기독교에로의 귀의이다. 결혼 생활의 처음 15년 동안 그는 만족한 생활을 하였고 여기서 얻어진 삶의 철학은 속에 고도의 창조력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아내인 소피야 안드레예브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고 그의 새로운 철학의 반석이 되었다. 그녀는 이상적인 아내, 어머니이며 가정의 여주인임을 입증하며 남편의 집필 활동을 헌신적으로 도왔으며 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곱 번이나 베껴 썼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톨스토이가 자신의 영지를 능률적으로 경영하고 작품 또한 잘 팔렸기 때문에 재산은 불어났고 그 결과 늘어나는 가족을 적절히 부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내만큼 가정에 몰입할 수 없었고 항상 도덕적인 문화와 충동으로 초조해 했다. 1866년에 그는 군법회의에서 장교를 구타한 죄로 피소된 한 군인을 위한 변호를 맡았으나 성공적이진 못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결혼 후 문학에 전념하여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입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사회를 그린 불후의 명작 (1864∼1869)를 발표, 이어 (1873∼1876)를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무상에 대해 심한 정신적 동요를 일으켜, 과학 ·철학 ·예술 등에서 그 해답을 구하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마침내 종교에 의탁하였다. 이때가 그의 전향기로서 (1880) (1881) (1882) (1882) (1884) 등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체계화되어 갔다. 이 전향 후의 사상을 보통 ‘톨스토이주의’라고 한다.
그의 사상은 현대의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배제하고 사해동포 관념에 투철한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하여 근로 ·채식 ·금주 ·금연을 표방하는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와 자기 완성을 신조로 하여 사랑의 정신으로 전 세계의 복지에 기여하려는 것이었다. 1882년 모스크바 빈민굴을 시찰한 후 사회조직의 결함에 깊이 생각이 미치자, 그의 사상적 번민은 종교적 ·윤리적 문제에서 사회제도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또 1885년에는 사유재산을 부정하여 이 문제로 부인과 충돌, 그 후 그의 일체의 저작권은 부인이 관리하였다. 그는 러시아 정교회에 속하지 않는 성령부정파교도와 친교가 있어 4,000명에 달하는 이교도들을 미국에 이주시키기 위한 자금을 조달할 목적으로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이 유명한 (1899)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