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수영의 생애와 활동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시인이다. 그의 성장기의 주된 삶의 공간이 도시라는 점은 그의 시가 전통 서정시의 공간인 농촌이나 전원이 아닌 도시를 배경으로 적극 차용하는 모더니즘적 성격을 지니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그가 두 자식의 사망한 뒤 태어난, 병약한 맏아들이라는 점도 그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할아버지를 비롯한 식구들의 지나친 관심과 애정을 받음으로써 자아 중심적인 고집불통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그래서 후에 그가 이어령과 벌이는 참여시 논쟁 “모든 전위문학은 볼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이나 시론 등에서 강하게 표출되는 타협을 모르는 신념의 고수는 유아기의 환경이 주요한 인자로 작용한다.
1941년 12월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고 1943년 귀국한다. 만주 길림으로 떠난 가족들에게 간 것이 1944년이고, 1945년 광복을 맞아 그해 9월에 가족들과 서울로 돌아왔다. 1945년 이후 김수영의 생애 이력은 그가 쓴 여러 산문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한데, 1946년 무렵부터 김기림.김광균.김병욱.임호권.박인환.양병식 등의 문인들과 교우를 맺으면서 예술부락 좌익문인들이 활개치던 8·15광복 직후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순수문학과 민족문학을 수호하려고 조연현의 주재하에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행한 잡지이다.
주요 필진은 조연현 외에 곽종원,·곽하신 ·조지훈 등이었으며, 통권 3호로 종간되었다.
에 를 게재한다. 1950년 8월에 박의용군에 강제로 입대 북행하여 훈련을 받고 순천군 중서면 부근에 배치되었다가 탈출하였다.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남하하여 집부근인 충무로 입구까지 왔으나 경찰에 체포되어 포로 신분으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52년 12월경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그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양계를 하며 시와 번역에 전념하였다.
1960년대에도 김수영은 양계와 번역료로 생활하면서 직장을 갖지 않고 시,시론,시평 등의 왕성한 발표를 통해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 의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참여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폭로하였다.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귀가길에 버스에 치여 의식을 잃고 운명을 달리한다.
2. 작품의 변모 과정
1)제1기(1945년 ~ 625전)
이 시기의 김수영의 시세계를 한 마디로 집약할 수 있는 단어는 보다이다. 이 시기 그의 시에는 눈에 띄게 보다, 응시하다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보다는 그의 시정신의 본체를 이루는 완전한 세계를 갈망하는 자유정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시어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김수영에게 있어 보다는 행동을 전제로 한 관찰이 아니라, 현실과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한 방관자의 응시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김수영의 태도는 그의 시세계에도 영향을 주어 이 시기 그의 시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세계관이 드러나고 있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김정숙, 『김수영 시 연구』, 국학자료원 , 2003
김학동 외, 『한국 전후 문제시인 연구 03 작가론』, 예림기획, 2005
최하림, 『김수영 평전』, 실천문학사, 2001
윤영우, 『김수영 시에 나타난 의식의 변천고』, 1991
김명인, 임홍배, 『살아 있는 김수영』, 창비, 2005
상허학회, 『새로 쓰는 한국 시인론』, 백년글사랑,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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