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제주 43 평화기념관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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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 43 사건 제주 43 평화기념관을 다녀와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REPORT
-제주 4·3 사건-
1. 제주 4·3 평화기념관을 다녀와서
제주4·3평화공원에서 개최한 위령제에 참석하였는데 추모승화광장에는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유족들과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비석에는 희생당한 사람들의 이름과 당시 연령, 사망날짜 등이 적혀 있었다. 이름 없는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석과 위폐들이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는지 말해 주었다. 각 명비에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며 4·3 평화기념관으로 향하였다.
박물관에서의 처음 시작은 동굴로 시작되었다. 굉장히 음습한 분위기를 자아냈는데 제주도민들에게는 동굴이 피신처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4·3의 역사를 향해 가는 여정을 나타내는 듯 했다. 긴 터널의 동굴이 끝난 후 비문 없는 비석을 볼 수 있었다. 이 비석에 이름이 없는 까닭은 봉기, 항쟁, 폭동 등으로 불려온 제주 4·3은 아직까지도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분단의 비극을 극복하고 통일이 되는 그 날에야 비석에 이름이 새겨질 수 있다고 한다.
그 다음 ‘해방과 좌절’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있는 관람실로 향했다. 그 곳에서는 6·25 전쟁부터 제주4·3의 도화선이 된 3·1발포사건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볼 수 있었다. 3·1절 기념대회에서 민간인 6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희생되었다. 이 관람실에서 3·1발포사건을 애니메이션 영화로 보여주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말을 탄 경찰이 아기를 걷어찼던 장면이 가장 슬펐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서 어린 아이들도 당시의 상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으로 본 곳의 테마는 ‘무장봉기와 분단거부’였다. 이곳에서는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일어난 무장봉기의 발생과정과 배경을 볼 수 있다. 5·10단선과 단정반대사건을 중심으로 연출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35명의 수감자를 가두었던 3.3평의 좁은 유치장이었다. 서있기도 비좁은 곳에서의 수감생활은 당시의 비참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또한 이곳에서는 ‘제주 4·3사건’이란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주었고 토벌대가 무장대의 숫자를 과장한 점, 무장대는 북한 공산군이라고 왜곡하고 부풀려 말한 점 등을 알 수 있었다.
다음 관람한 곳은 ‘초토화와 학살’의 테마를 갖는 곳이었다. 원통 모양으로 된 커다란 하얀 방의 벽에는 죽음의 다양한 형상의 부조물을 볼 수가 있었다. 모형으로만 봐도 참혹한데 실제로는 얼마나 더 잔혹할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리고 그 곳에는 제주도민에 대한 만행의 기록이 나와 있었다. 경찰은 임산부를 발가벗겨 나무에 매달아 놓고 대검으로 찔러 죽이거나,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는 마약중독자가 제주도민들의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등 제주도민들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 다음 아주 특별한 곳을 관람했는데 다랑쉬 굴을 그대로 재연한 특별전시관이었다. 해골들과 도자기 파편, 그리고 사람이 생활할 수 없는 좁고 열악한 동굴은 당시 제주도민의 생존을 위한 처절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캄캄한 굴속에 갇혔다가 40여년 만에 빛을 보았지만 허무하게 화장된 것은 진실을 은폐하고 외면하려고 했던 당시대의 현주소였다. 92년 처음 다랑쉬 굴을 발견하고 언론은 4·3사건의 진실을 밝히려고 했지만 정부기관은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유해들을 불태워 바다에 뿌리고 다랑쉬 굴은 봉쇄되었다. 그러기에 제주도민의 한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관람한 곳은 ‘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의 테마가 있는 곳이었다. 진상규명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해서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의 사과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4·3의 중요한 기록이 된 ‘순이 삼촌’을 볼 수가 있었다.
관람이 끝나고 나가는 곳에 방문객들의 ‘관람소감문’이 걸려 있다. 메모의 내용들은 4·3이 너무 비극적이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평화와 상생을 얘기하고 있다. 어두웠던 전시관이 끝나고 밝은 이 곳에서 화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픈 역사의 기억을 통해서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곳이었다.
제주4·3평화박물관은 외면적으로 보나, 설립 취지로 보나 다른 박물관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 박물관은 역사적 사실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다른 박물관 같은 경우에는 역사적 유물을 전시해서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에 초점을 둔다면 평화박물관은 우리가 직접 역사의 현장에 있는 느낌이 들게 하고 그 곳에서 당시의 비극적 상황을 이해하고 6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느끼게 했다. 4·3이 발생한 시초부터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까지 알려주는 곳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제주의 역사를 아픈 비극으로서만 끝낼 것이 아니라 4·3을 극복하고 평화와 상생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지금 제주도는 해군기지 건설,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카지노 유치 등 다양한 문제들로 인해서 여러 갈등 상황에 직면해 있다. 제주도는 평화의 섬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해군기지 설치가 제주도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지, 한라산 케이블카를 설치한다면 우리는 상생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지 알아야겠다. 지금 제주도민이 원하는 것은 조금 더 확실한 진상규명 조사와 다시는 이런 비극이 제주도에 생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제주도가 필요한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박물관에 와서 많은 것을 느끼고 갔으면 한다. 한국 현대사의 역사와 제주도민 학살의 비극성도 느끼며 4·3 진상규명을 통해 화해와 상생을 염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4·3을 겪었던 세대에게는 화해의 감정을 느끼게 하고, 후세대의 사람들에게는 상생으로서 역사 교훈의 장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그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가슴 아픈 역사를 알아가고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것은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을 기르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또한 아픈 역사를 극복하여 평화와 상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 우리가 이렇게 박물관에서 4·3을 바라본 이유일 것이다.
2. 을 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