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에 감춰진 위선
[서론]
“그대는 증서에 명시된 대로 살 1파운드만 취하되, 저 기독교인의 피 한 방울도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
희곡 베니스의 상인을 떠올리라고 하면, 열이면 열 이 판결문을 떠올리게 된다. 이토록 유명한 이 판결문은 베니스의 상인의 명대사이자 확 트이는 반전과 같은 결말에 이르게 하는 결론이기도 하다. 결국 생명을 경시하는 사상을 가진 극악무도한 유대인 샤일록을 참패하게 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던 의리 있는 안토니오는 살아나게 한다는 해피엔딩은 많은 사람들이 보면서 속 시원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해피엔딩을 우리는 단순하게 해피엔딩이구나 하고 바라봐도 되는 것일까?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해왔던 이 베니스의 상인 안에는 우리가 미처 고려해오지 못했던 몇 가지 위선이 잠재되어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저 유명한 판결문 외에 샤일록에게 내려진 판결은 이러했다. 타국인(유대인)이 베니스의 주민의 생명을 직간접으로 위협했다는 법에 저촉되어 재산의 반은 안토니오에게 나머지 반은 국고에 귀속된다는 판결에 작가는 기독교인의 자비심이라도 보여주려는 것인지 그 판결의 선택권을 안토니오에게 돌린다. 졸지에 선택권을 손에 쥐게 된 안토니오는 샤일록은 단순한 벌금형으로 마무리 짓게 하고, 샤일록 소유 재산의 절반은 안토니오가 보관했다 샤일록의 딸 부부에게 물려주자고 한다. 또한 샤일록이 종교를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라는 말을 한다.
이렇게 결말을 지어내며, 모두 모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하는 이 내용에 대해 우리는 마냥 해피엔딩이라고 웃을 수만은 없다. 마치 자비롭고 의리 있으며, 도덕적인 기독교인이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는 유대인을 용서하는 듯 겉모습을 화려하게 위장한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대해 옳소, 옳소 라고 단순히 동조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본론]
1. 희곡 베니스의 상인은 아름다운 도시 베니스를 배경으로 쓰였다. 당시의 베니스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엄격히 차별하고 있었다. 그 예로, 유대인을 게토라는 거주지에 따로 거주하게 하였고, 혹 그 거주지를 나와 다른 지역으로 갈 때는 유대인이라는 증거로 빨간 모자를 쓰게 하였다. 또한 베니스의 상인에서 드러나는 유대인의 존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한다. 단지 민족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유대인을 차별하는 풍조는 이 희곡 전반적인 배경에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유대인인 샤일록은 안토니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그에 대한 보복심으로 안토니오의 생명을 담보로 한 계약을 하게 된다. 그가 이런 계약을 하는 것은 안토니오와 샤일록이라는 개인과 개인 간의 원한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유대인이란 이유로 천대받고, 그리고 그들을 천대한 민족과 민족 간 다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유대교든 기독교든 종교적 관점에서 비추어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며, 모두가 평등한 위치에 놓여있다. 또한 정치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사람은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가 다 소중하고 평등한 존재이다.
하지만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개개인의 인권이 존중된 다기보다는 샤일록이 단지 기독교인들과는 다른 종교를 믿는 다른 민족이기 때문에 그의 인권은 존중받지 못한다. 영화 베니스의 상인에서 그려진 샤일록은 많은 베니스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유대인이라고 하여 내가 당신들과 다른 살가죽을 가지고 있소? 유대인이라고 하여 내가 칼로 찌르면 피가 안나오는 괴물인 줄 아시오? 유대인이라고 하여 내가 당신들과 다른 것을 먹는 줄 아시오? 나도 똑같은 인간이오.” 이 외침은 베니스의 상인에서 그려진 당시의 사회가 유대인을 인간 취급도 해주지 않음을 똑똑히 들려주고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평등하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더 귀하고, 누가 더 못나다는 귀천이 없다. 그런데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유대인을 천대하고, 마치 짐승처럼 대하며, 무시하는 풍조가 당연시되듯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믿는 하나님이란 전지전능한 아버지의 열 손가락을 깨물어 어떤 손가락은 아프고, 어떤 손가락은 아프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유대인을 천대하던 이 풍조가 정당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성적 두뇌로도, 그리고 감성적 가슴으로도 이민족이 천대받는 인권모독적인 현상은 절대로 이해될 수 없는 것임을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2. 우리가 공정하다고 믿어온 베니스의 상인의 판결문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제기 된다. 버사니오의 아내 포셔는 자신을 법률학자로 위장하고, 베니스의 법정에 들어선다. 하지만 이미 포셔가 발걸음을 떼었을 때부터 판결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 그녀는 객관적 입장에 서서 판결을 공정하게 내렸다기보다는 남편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 이미 시작 전부터 안토니오의 손을 들어주고 시작을 한 셈이다. 그녀는 샤일록에게는 이미 불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게다가 그녀가 내린 판결은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샤일록을 궁지로 몰고 간다. 피 한 방울도 가져갈 수 없다, 오로지 살 1파운드만 취하라는 첫 번째 말로 안토니오의 생명을 구했지만,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진 빚을 단 한 푼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우선 샤일록을 궁지로 몰고 갔다. 또한 외국인이 직간접적으로 목숨을 노렸을 경우 재산의 절반을 국고에 귀속하고, 나머지 절반을 피해자에게 양도하며, 목숨은 공작의 재량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샤일록은 지옥에 떨어진 사람처럼 차라리 죽여 달라는 말까지 언급한다.
게다가 소수인 유대인인 샤일록이 재판을 하는 내내 주변인인 그래쉬아노, 버사니오에게 공격적인 말을 들어가면서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그에게 있어 거대한 다수인 안토니오의 측근들과 그저 나약한 유대인인 소수의 대결에서 재판은 나약한 소수인 유대인을 바닥 밑으로 끌어내려버린다. 이는 어찌 보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요구하는 공리주의적인 관점과도 유사한데 이러한 관점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라는 문제가 보인다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 때문에 샤일록이 자신에게는 너무나도 가혹하기 짝이 없는 이 판결에 대해 한 마디도 대응하지 못하고 순응했다는 점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공정한 것처럼 보이는 재판은 그저 다수의 횡포를 멋들어지게 겉치장한 위선에 불과한 것이다. 게다가 언제나 객관적인 입장에 있어야 할 재판관인 포셔는 안토니오를 돕기 위해 위장된 사람이었으니 이 판결은 처음부터 끝까지 공정할 수 없는 것이다.
3. 앞에서의 가혹한 판결에 대한 선택권을 포셔와 공작은 결국 안토니오에게 넘기는데, 안토니오는 마치 기독교인의 자비심을 베풀 듯 샤일록의 처벌을 벌금형으로 가볍게 줄여달라는 부탁과 함께 그 조건으로 그를 기독교로 개종하게 하라는 말을 꺼낸다. 종교는 사람 각자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종교란 것은 그 사람이 전반적으로 살아온 전 생애의 생활 패턴이며, 그 사람의 머리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의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안토니오는 마치 자비를 베푸는 척하며, 어쩌면은 가장 가혹할 수 있는 형벌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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