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서의‘문명’의 개념

 1  동아시아에서의‘문명’의 개념-1
 2  동아시아에서의‘문명’의 개념-2
 3  동아시아에서의‘문명’의 개념-3
 4  동아시아에서의‘문명’의 개념-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동아시아에서의‘문명’의 개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동아시아에서의 ‘문명’의 개념

초기 유교권에서는 ‘문명’이라는 용어가 사용됬다. 예를 들면, 『역경』에서 “文明以止 人文也”구절이 있다. 문명이 사용됐지만 文明의 의미는 ‘문채가 밝게 드러난 것’으로, 지금과는 다른 의미로서 ‘문명’의 용어가 사용됬다.
한국의 경우를 보면, 고려 원말에 원에서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문명에 유학적의미가 결부되어진다. 이색의 문집에서 “宋文明之世” 송나라시대를 문명한 시기로 표현한다. 즉, 성리학의 등장을 문명과 연관시키고 있다.
문명은 조선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유학적 교화의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文이란 道 가 구체적 형상으로 드러난 것으로 즉, 유학을 통해서만 道를 구체적 형상으로 드러내고 文明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 이후에도 17세기에 들어 사림들이 정치적 우위를 차지하면서 성리학 중심의 문명관이 정립되어 갔다.
성리학적 문명관은 성리학 이외의 것을 이단시하고 배타성이 너무 강했기에 이를 따르는 조선은 성리학적 문명기준으로 좋고 나쁨을 구분하였다. 예를 들면 김육(1580~1658)은 불교를 거론하면 석가모니 등도 뛰어난 사람들이고 그들로 하여금 인의(仁義)를 확충하고 예악(禮樂)의 가르침을 행함을 권했는데, 성리학자들에게는 불교는 이적의 풍습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한국의 문명관은 성리학 중심의 문명관으로 굳혀진다.
한편, 문명과 유사한 의미로 쓰인 문화는 본래 ‘형벌이나 위력을 이용하지 않고 백성들을 교화하는 일’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후 문명과 함께 문화도 유교적 교화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 되었다. 심염조(1734~1783)는 월과(月課)를 법식대로 시행하면 문화가 크게 진작될 것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문화는 유교적 교화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서의 문명과 문화는 대부분 유교적 교화의 의미로서 사용되었다.

동아시아에서‘civilization’을 ‘문명’으로 최초 번역한 인물은 일본인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그는 ‘문명’을 문명개화 또는 개화라고 사용했다. 그는 문명을 여러 의미로 정의하였다. 그의 저서인 『西洋事情』에서 ‘인생은 莽昧에서 시작하여 점차 문명개화로 나아간다.
莽昧의 세상에서는 예의의 도가 아직 행하지지 않아 사람들이 스스로 혈기를 제어하거나 정욕을 누를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이 문명으로 나아감에 따라 이 풍속도 점차 멈추어 예의를 존중하고 정욕을 억제하며 살아간다.‘라고 했다. 문명은 예의의 존중과 정욕의 억제를 뜻했다.
그의 저서인 『학문에 관하여』에서 그는 ‘문명’은 개개인이 ‘지덕’을 갖추는 것이라 하며, 나아가 문명을 유형의 것인 ‘문명의 형태’와 무형의 것인 ‘문명의 정신’으로 구분하면서 ‘문명의 정신’을 중시했다. 그는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래 정부가 학술· 법률· 무역 등을 진흥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무기력과 독립심 결여로 일본이 아직 문명개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중시한 ‘문명의 정신’은 국민들의 무기력과 독립심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그는 서구의 위협이 일본의 몰락을 야기하고 서구가 일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 역시 문명의 진보를 통해 형성된 것이라 생각하고, “나라의 독립은 곧 문명이다. 문명이 아니면 독립을 보전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즉. 그는 문명이 독립의 수단이며, 개개인의 ‘지덕’을 갖추는 것이 핵심이라고 여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