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환 선생 묘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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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민영환 선생 묘 답사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 본관은 여흥(驪興) 민씨
*병조판서 민겸호의 아들, 명성황후의 조카
*1877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뒤 정자(正字) ·수찬 등을 거쳐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8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민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간 거상,1887년 예조판서 1888년, 18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95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 군부대신으로 있을 때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와 신문명에 밝았다.
*귀국 후 참정(參政)에 올랐고 훈장조례를 처음으로 공포하였으며 외부·학부·탁지부 대신을 역임하여 나라의 운명을 바로 잡으려 분투하였으나 독립당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대신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우정대신 조병세와 함께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못하시고 1905년 11월 4일 유서3통을 남기고 단도로 자살하였다.
*시호와 함께 영의정을 받았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받았다.
·민영환 어른이 자결한 후 피묻은 옷을 간직했던 마루에서 대나무가 솟아 올랐다.
1906년 7월 5일자 대한 매일신보(현 대한매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공의 집에 푸른 대나무가 자라났다. 생시에 입고 있었던 옷을 걸어두었던 협방 아래서 푸른 대나무가 홀연히 자라난 것이라 한다. 이 대나무는 선죽과 같은 것이니 기이하다
· 대나무의 45개의 입사귀는 순국할 때의 나이와 같은 숫자여서 더욱 신기하게 여겨졌다
· 혈죽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당황한 일제는 혈죽이 조작된 것처럼 만들고자 했다. 그들은 대나무가 뿌리를 통해 번식한다는 점을 주목, 집주변에 대나무가 있는지 면밀히 조사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대나무는 찾지 못했다.
· 잊혀졌던 혈죽이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민것은 광복 이후,일제가 뽑아버린 대나무를 고이 수습한 충정공의 부인 박수영 씨에 의해서다. 박씨는 자줏빛 보자기로 대나무를 싸고 폭 8센티 길이 50 센티 정도의 나무 상자 속에 넣어 보관 했다.
고이 간직해온 혈죽은 유족들이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 옮겨지게 됐다.
1905년 11월 4일
묘소 앞에는 민영환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승만대통령이 쓰셨다고 합니다. 신도비에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친필 제자(題字, 비석에 쓴 글자)와 그가 자결하였을 때 남긴 유서(遺書)도 함께 세겨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