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학파와 화담 학파 연구
남명의 문인들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걸쳐 가장 활발한 양상을 보인다. 이 장에서는 기축옥사에서 남명 문인 등이 대응 했던 모습과 임진왜란시의 의병활동, 광해군대에 남명의 학통을 강화하는 모습을 통해 이 시기 남명 문인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포착하고 이러한 활동들이 갖는 시대적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박학풍과 실천의 중시
남명의 문인들에게서 우선적으로 나타나는 면모는 학문에 있어 뚜렷한 이론을 남긴 인물보다는 직접적인 현실 대응을 통해 절의로써 평가받는 인물이 많다는 점이다. 그만큼 현실에 대해 직선적인 대응을 했음을 보여준다. 남명의 문하에서는 성리학의 이론 탐구의 측면에서 돋보이는 인물이 배출되지 않았다. 이것은 이론 논쟁을 배격하고 실천을 중시한 남명의 학문적 흐름이 계승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의(義)’를 중시한 남명학파의 학풍은 나아가 경상우도의 학풍을 특징짓는 용어가 되기도 하였다. 퇴계의 학풍이 미친 경상좌도의 ‘상인(尙仁)’과 비교하여 경상우도는 ‘상의(尙義)’가 있다고 지적한 남인 윤승훈의 말은 대표적인 것으로서, 경상우도를 지역적 기반으로 한 남명학파의 학인들은 ‘의’로 대표되는 실천적 학풍을 지켜 나갔다. 남명학파의 이러한 실천적 경향은 남명의 수문인 정인홍의 학풍에서 우선적으로 찾을 수 있다.
정인홍은 광해군대에 대북정권에 깊이 참여했다가 1623년의 인조반정으로 처형을 당한 까닭에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에 있었으며, 자신의 학문을 정치현실에 실현시키려고 한 점이 두드러진다. 정인홍의 학문이 실천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은 그의 문집에 수록된 글들 중 성리학의 이론에 관해 개진한 글이 거의 없고 상소문 등 자신의 정치관과 현실관을 피력한 글들이 대부분인 것에서 단적으로 확인 할 수 있다. 문장이 형식만을 강조하고 실용이 없는 점을 비판한 것 역시 그의 실천적 학풍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정인홍의 학풍은 정통 주자성리학자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심득을 중시하여 정좌묵상(靜坐想)하는 태도나 지행합일을 추구하고 심성의 배양과 도덕성을 강조하였으며, 노장, 선학, 양명학적인 특징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정인홍은 스승인 남명처럼 학문의 실천 문제에 중점을 두는 한편, 실천에 필요한 다양한 사상을 흡수하여 민생 문제나 상공업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정인홍은 부역의 번중(煩重)과 방납의 피해로 백성들의 폐해가 날로 심해지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인정을 실시하기 위한, 그는 시세가 변하였는데도 정치제도를 고집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제시하면서 전란 후에 군현을 병합하여 대진을 설치하자는 주장을 하였으며, 은광 채취와 개시 등의 중요성을 강조 하였다. 정인홍이 농업 이외에 상업이나 시장, 무역 등에 관심을 가진 것은 이러한 방안이 백성들을 구제하기에 유용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 이였다. 그가 물화의 유통을 통해 ‘활여민(活餘民)’하는 방안을 찾은 것은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정인홍의 사상은 18세기 이후 북학파 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이용후생적인 사상의 선구적 모습이라는 점에서도 관심을 끈다.
정인홍은 남명과 같이 노장사상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인홍이 상소문에서 “군주가 백성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공도가 행해져 결국에는 닭과 개 우는 소리가 들리고 연기가 만리까지 뻗어간다”고 한 내용 중 ‘계견상문이연화만리(鷄犬相聞而煙火萬里)’라는 내용은 「노자」와 「장자」에서 비롯된 용어로 정인홍이 노장사상에서 추구하는 이상향에 관심이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인홍이 노장사상에 경도되었던 것은 스승인 남명의 영향과 함께 남명의 종유로서 도가적 처세를 한 성운의 행적에도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도가적인 경향은 남명의 문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이었다. 남명의 문인 중에 도가양생법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인물로는 곽재우를 들 수 있다.
남명학파의 학문적 다양성과 도가사상을 절충하는 흐름은 이들 학파를 특징짓는 요소로 보아도 무방할 듯싶다.
2.기축옥사와 남명학파
남명학파의 학인들이 주자성리학을 절대시하지 않고 현실에 직선적인 대응을 하였음은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일컬어지는 기축옥사에서 남명학파 내에 그 연루자가 많았다는 데서도 간접적으로 확인 할 수 있다. 1589년의 기축옥사는 동인 내에서 남인과 북인의 분립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남명학파의 입지에 중요한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이 사건은 동인 중 일부 급진 세력이 관여된 것이지만 서인측이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려는 입장에서 강경한 처벌을 가함으로써 동인 세력 중 특히 남명과 화담 문인들의 피해가 컸다. 결국 이 사건을 기회로 남명 문인과 화담문인은 퇴계문인과 다른 당색을 형성하였다. “기축옥사에서 북인이 많이 죽은 것은 정여립이 북인계열이었기 때문이다”라는 「연려실기술」의 지적처럼 정여립은 북인으로 파악되었으며 북인의 모집단을 형성한 남명 문인과 화담 문인은 그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기축옥사는 정치사뿐만 아니라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정여립은 스스로가 “천하는 공물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요”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할 만큼 정통주자학의 입장에서는 일탈된 사상의 소유자였으며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유교 경전에 통달했으며, 의논이 과격하여 드높아 바람처럼 발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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